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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공감세상] 자회사가 소환한 기억 / 김진

등록 2019-09-09 17:33수정 2019-09-09 18:53

김진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돌아보면, 호기롭게 노동 변호사가 되겠다고 했지만, 처음엔 노동법에 대해서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때 내 맘속에 노동법은 정의였고 상식이어서, 열심히만 하면 사람들을 돕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무기였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공공기관의 정리해고 사건을 상담했는데, 정리해고 사유가 기계 설비 및 관리 업무를 외주화하기로 정하고 외주업체로 소속을 바꾸라는 동의서에 서명하지 않는 사람은 정리해고 한다는 것이었다. 기업이 도산할 정도로 어렵거나 사업 축소나 매출 격감으로, 할 업무가 줄어 어쩔 수 없이 사람을 내보내는 것이 정리해고이거늘, 100% 정부에서 출연하고 공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에서, 그것도 그 기관이 유지되려면 당연히 있어야 하는 시설관리 업무는 그대로 있는데, 그저 ‘외주화’하고 같은 직원들의 소속을 외주업체로 바꾼다고 하면서 정리해고라니.

말이 안 된다, 상식에 맞지 않는다, 내가 알던 정의가 아니다, 무조건 승소! 라고 생각하며 사건을 맡았다. 하지만 막상 사건을 진행하다 보니 불리한 선례가 너무 많았다. 도산 위험까지 아니더라도 영업수지가 전보다 악화되었거나 심지어 장래 경영합리화를 위해서라도 정리해고는 가능하다는 대법원 판례, 그중에서도 시설관리·경비 업무를 외부에 맡기는 이른바 ‘아웃소싱’은 적절한 경영합리화 방법으로 유효하다는 낯선 ‘상식’. 수차례 서면을 내고 증인을 다그치고, 오만 군데 사실 조회를 해서 합리성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심에서 패소하고 항소심을 시작했을 때, 기관에서 노조위원장에게 외주업체 대표 자리와 노조원들에게 전보다 좋은 근로조건을 보장할 수 있는 용역조건을 제안했다. 패소에 실망한데다 긴 소송에 지쳐 마지막 기회라는 압박에, 조합원들은 취하하고 용역업체로 들어갔다.

포기하는 것을 말리지 못한 신참 변호사의 마음은 어떠했던가. 당사자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 어차피 항소심을 끝까지 가도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 없음, 그리고 끝까지 간다면 나쁜 선례만 하나 더 만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교차했던 듯하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으로 경제가 침체되고, 그동안 상대적으로 안정적 근로조건을 보장했던 공공기관의 구조조정이 대세로 자리 잡은 2000년대 초반이었다. 퇴직금 누진제 폐지는 사회통념상 합리성이 있어 일방적으로도 가능하고, 부부사원 중 아내 직원을 퇴사시키기 위해 사표를 받는 것도 정당하며, 기관을 통폐합하면서 고용승계를 안 해도 된다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고, 법원은 그러한 분위기를 노동법의 언어로 정당화하였다.

요즈음 뉴스를 볼 때, 스무해나 지난 먼지 쌓인 기억이, 어제처럼 생생해진다. 고속도로 순찰과 톨게이트 요금수납 업무 외주화는 고스란히 불법파견으로 돌아왔고, 하루가 멀다 하고 등장하는 중대 산업재해에서 피해자는 하청업체 또는 협력업체 직원들이다. 지난달 고 김용균 사망사고 특별조사위원회가 발표한 보고서에서도, 사고의 구조적 뿌리를 2001년 이후 전력산업 구조 개편과 정비부문 민영화·외주화에서 찾고 있다.

고용노동부 자료(7월23일 보도자료)에 따르면, 6월 말까지 공공기관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자 7만1549명(중앙부처·지자체·지방공기업·교육기관 제외) 중 파견·용역 정규직 전환(완료)자는 4만5754명인데, 이 중 자회사 소속으로 전환된 사람이 2만9333명으로 64%가 넘는다. 자회사를 통한 정규직화는 임금과 복리후생 등의 차별 문제뿐 아니라 별도의 자회사 운영에 따른 경상비가 발생하고 잠재적인 고용불안의 가능성, 불법파견, 안전사고의 위험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20년 전 경영합리화를 위해서라면 괜찮다고 했던 ‘외주화’가 그 이후 차별, 불법파견, 위험의 외주화라는 괴물을 낳았다. 2019년에 우후죽순 생겨난 정체불명의 ‘자회사’들은 어떤 괴물을 낳게 될까. 20년 전 그 소송을 포기하던 그 신참 변호사처럼, 많이 두렵고 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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