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 정권 출범 초기 어느 일요일, 서울의 한 지청 검사가 한 신문사 기자를 조용히 검사실로 불렀다. 그리고 얼마 뒤 전직 대통령의 가까운 친척을 소환했다는 기사가 그 신문 사회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5공 비리’ 수사가 본격화하는 계기가 됐다. 검찰이 ‘정권의 시녀’ 노릇을 하던 시절 검사들은 이른바 ‘거악’ 수사를 막으려는 외압을 뚫기 위해 기자들과 적극 공조했다. 피의사실공표였지만 비리를 파헤치겠다는 정의로운 싸움은 국민의 알 권리를 방패 삼아 ‘정당행위’임을 내세울 만했다.
이후 정치 민주화와 함께 검찰이 ‘법치’를 책임지는 유일 권력기관으로 등극하면서 피의사실공표는 조직 차원의 유용한 무기가 됐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나 서울중앙지검 특수부가 권력 실세나 재벌 총수 수사에 들어가면 언론은 1면 머리기사 특종 경쟁에 뛰어들어야 했다. 제아무리 권력자라도 검찰청사 포토라인에 서야 하고 ‘알 권리’ 대의명분 아래 초상권이나 인권은 후순위로 밀렸다.
이런 검찰 관행은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위기를 맞았다. 6월 검찰은 수사공보제도개선위원회를 꾸리고 이듬해 1월 ‘인권보호를 위한 수사공보준칙’을 시행했다. 피의사실 공개를 원칙적으로 금지했다. 그러나 예외가 많고 위반자 처리 규정이 없었다. ‘중대한 오보’ 또는 추측성 보도를 방지할 필요가 있거나 언론에 공개된 경우 등 5가지나 예외를 인정해 결국 무용지물이 됐다.
지난 5월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가 피의사실공표에 대한 권고의견을 내놓았다. 허용되는 수사공보 행위와 처벌되는 피의사실공표 행위를 분명히 구분하고 공보준칙 대신 수사공보법을 제정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검찰이 피의사실공표 불기소 때마다 위법성 판단의 기준으로 인용하는 한 대법원 판례를 제시했다. 회사 기밀을 누설한 간부에게 업무상배임 등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됐으나 무죄가 났고, 대법원은 영장 혐의를 언론에 섣불리 공개한 검사의 위법성과 명예훼손 책임을 인정했다.
울산지검이 약사면허증 위조 구속 사건에 보도자료를 낸 경찰을 피의사실공표 혐의로 수사 중이고, 경찰은 ‘조국 의혹’과 관련해 학교생활기록부 유출 경위 등을 수사 중이다. 과연 알 권리와 피의사실공표의 경계는 어디일까. 고민이 필요한 때다.
김이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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