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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공사분별 잃은 조국의 ‘지시’ / 강희철

등록 2019-09-17 17:55수정 2019-09-17 19:03

강희철
법조팀 선임기자

권총을 뽑아 든 남녀가 숨죽이며 어떤 건물 지하 ‘현장’을 급습하려는 찰나, 느닷없이 전화벨이 울린다. 당황한 수사관들 얼굴 위로 광고 문구가 스친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1990년대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린 어느 통신사의 광고 카피다.

휴대전화야 언제 어디서나 ‘터지는’ 것이 미덕일 수 있지만, 사람의 언행은 그렇지 않다. 가령 선의를 듬뿍 담은 ‘노력’도 눈치 없이 입에 올렸다간 ‘꼰대’ 낙인을 자초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적시(알맞은 때)는 모든 일의 본성을 바꾼다”(에라스뮈스 <격언집>)고 했다.

조국 법무부 장관이 연일 ‘장관 지시’라는 것을 내놓고 있다. “도대체 조윤선은 무슨 낯으로 장관직을 유지하면서 수사를 받는 것인가. 우병우도 민정수석 자리에서 내려와 수사를 받았다”는 자신의 트위트(2017년 1월11일)는 뭉갠 지 오래다. 9일 취임 이후 불과 며칠간 쏟아낸 지시가 전임 박상기 장관의 임기 중 지시 전체와 맞먹는다는 우스개까지 나올 정도다.

그중 도드라진 것이 지난 11일 ‘2호 지시’로 내놓은 ‘검찰의 직접수사 축소’다. 직접수사는 곧 특별수사의 동의어다. 그는 지난 6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이 문제를 처음 입에 올렸다. 조 장관을 ‘저작권자’로, 현재 국회에 제출된 이른바 검찰개혁 법안 어디에도 검찰 직접수사 축소는 들어 있지 않다.

반면 법조계와 학계 등에선 검찰개혁의 요체로 특별수사 폐지를 꼽은 지 오래다. 범죄의 인지, 수사, 기소, 공소유지를 한 사람 혹은 하나의 조직이 도맡게 되면 반드시 폐단이 생긴다는 문제의식에서다. 한 전직 검찰총장은 “기소권을 가진 검사가 심문까지 직접 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한다. 검사 출신인 금태섭 더불어민주당 의원도 “검찰의 수사권을 폐지하거나 대폭 축소하면 바로 개혁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특별수사가 검찰 권력의 원천이자 급소라는 뜻이다. 전임 문무일 검찰총장은 직접수사권을 내려놓겠다고 했었다. “저희 검찰이 의문을 받는 부분은 주로 특별수사, 인지수사라고 생각합니다. (…) 상당히 축소해야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2018년 3월1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그러나 ‘조국 민정수석’은 “현실적 필요”를 들어 이 모든 의견을 외면했다.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내달렸다. 적폐 수사를 명분으로 특수부의 팽창을 용인했다. 갖은 무리수를 둬가며 이름난 특수통인 윤석열을 기어이 검찰총장으로 만들었다. 서울중앙지검장의 총장 ‘직행’에 대한 비판과 경고에는 귀를 막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윤석열 사단’을 요직 곳곳에 배치하며 전대미문의 ‘특수 전성시대’를 열어줬다. 이면에선 검찰 직접수사 폐지를 역설한 대검 미래기획형사정책단장을 좌천 보내고, 청와대발 검경수사권 조정안에 반대하는 문 총장의 목소리를 대변했다는 이유로 대검 간부 검사를 서울고검으로 날렸다.

그랬던 조국이 장관이 되고서 검찰 특별수사 축소를 지시했다. 그사이 달라진 건 그 자신이 피의자로 검찰 특수부에 입건됐다는 사실 말고는 없다. 조 장관이 이제라도 검찰 특별수사의 폐단을 깨달았다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그걸 바로잡겠다고 말하는 때와 장소다. 세상 어느 피의자가 자신을 수사하는 기관을 축소하라고 엄명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는가. 그의 지시는 기껏해야 장관 권한을 방어권 행사라는 사익 추구의 수단으로 변질시키는 직권남용적 행위로 비칠 뿐이다.

그러니 “예민한 시기이니만큼 언행에 조심해야 한다”는 그의 당부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 무시로 올린 소셜 미디어 글 때문에 그만큼 곤욕을 치렀으면 교훈을 얻을 때도 됐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던’ 그 통신사는 몇년 뒤 광고 카피를 바꿨다. 배우 한석규가 스님과 함께 고요한 대나무숲을 걷는데 느닷없는 전화벨이 울린다. 계면쩍은 표정의 한석규가 묵직하게 한마디 한다. “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

hck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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