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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대학교수 시국선언 실명제 / 안영춘

등록 2019-09-23 14:39수정 2019-09-24 13:22

말년에 미셸 푸코가 주목한 그리스어 ‘파레시아’(parrhesia)는 직역하면 ‘모두 말하기’이지만, ‘용기 내어 진실 말하기’ 정도의 개념으로 쓰인다. 부분적 사실만을 말하면 진실에서 멀어지는 원리와, 진실에 부합하는 모든 사실을 말해도 환대받기 쉽지 않은 현실을 겉과 속으로 아우른 듯하다. 특히 진실 말하기는 권력자의 노여움을 사기 마련이다. 사마천은 궁형을 당했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회부돼야 했다.

근대 이후로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에밀 졸라는 1898년 드레퓌스 재판을 겨냥해 ‘나는 고발한다’를 쓰면서 자신이 40년 동안 쌓아온 권위와 명성을 걸겠다고 했으나, 정작 걸지도 않은 생명까지 위협받아야 했다. 진실을 말하고 외려 손가락질받는 일은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하다. 그나마 지난해 시작된 ‘미투’로 진실 말하기의 사회적 수용성이 조금 높아지지 않았나 싶다. 그 전만 해도 성폭력 피해 생존자 증언대회는 주최 쪽의 엄격한 통제 속에서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익명성 보장은 피해자나 약자가 진실을 말하도록 조력하는 사회윤리적 측면이 있다. 아무 보호장치 없이 이들에게 용기만을 요구하는 것은 오히려 인권과 정의의 공백 상태를 방증한다. 인권을 중시하는 국가일수록 내부고발자나 공익제보자의 비밀을 지켜주는 법 규정이 튼튼하고 촘촘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지식인의 진실 말하기만큼은 ‘실명제’라야 한다. 피해자나 약자의 발언은 ‘증언’이지만 지식인의 사회적 발언은 ‘비판’이기 때문이다. 이마누엘 칸트의 ‘비판 시리즈’에서 보듯이, 지식인의 비판은 사실과 해석의 정확성과 정합성 등을 성실히 추구한 뒤 제출하는 언술이자 공론장에서의 경합이다. 익명에 기대어서는 결코 할 수 없는 작업이다.

얼마 전 3천명이 넘는 대학교수들이 시국선언을 냈는데, 대부분이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대학교수들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시국선언을 해온 전통은 유구한데, ‘익명 시국선언’은 들어본 일이 없다. 인터넷 서명을 받던 도중 훼방꾼들이 끼어드는 바람에 그리됐다고 하는데, 시국선언을 허투루 준비했다는 고백이나 다름없다. 곧 실명을 공개하겠다고 하니, 지식인의 용기를 제대로 보여줄지 지켜봐야겠다.

안영춘 논설위원 jon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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