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사회학 연구자 단식과 달리 삭발은 건강에 영향을 미치진 않는다. 머리카락은 어차피 다시 자란다. 그렇다면 삭발이 왜 투쟁에서 의미가 있을까. 삭발은 수행의 각오, 항거의 의미, 징계의 징표 등이었다. 특히 신체발부 수지부모라는 유교 문화권에 있는 한국에서 삭발은 ‘몸을 깎는다’는 상징성이 있었다. 투쟁하는 사람들은 개인의 개성을 지우고 오직 정치적인 몸이 되어 발화하기 위해 머리카락마저 잘라낸다. 자유한국당의 삭발은 단식투쟁을 조롱하는 폭식투쟁만큼 폭력적이진 않더라도, 삭발의 의미를 변질시킨다는 점에서 쓴웃음이 난다. 약자의 언어를 빼앗듯이 이들은 꾸준히 연좌농성, 삭발, 단식과 같은 투쟁의 언어를 집어삼킨다. 패션으로서의 삭발인지, 나름 미용적 측면을 고려하여 ‘빡빡’ 깎지는 않았다. 게리 올드먼과 율 브리너를 언급하며 서로 띄워주는 모습에는 웃음도 안 난다.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삭발한 뒤 더욱 젊은 남성의 이미지를 얻었고 강한 남성성에 도취된 모습을 보인다. 이제 한발 더 나아가 스티브 잡스 흉내를 내느라 운동화에 면바지와 헤드셋 마이크까지 소품으로 갖추고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가 연출하는 젊은 이미지에 비하면 전하는 메시지는 퇴행적인 반노동 정책일 뿐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제 어머니의 머리 모양으로 지지층을 결집시키는 일종의 ‘향수’ 전략을 썼다면, 현재 자유한국당은 나름 젊은 이미지를 얻으려 몸부림친다. 나아가 삭발의 남성성은 나경원 원내대표의 삭발을 부추긴다. 특히 외모가 많이 언급되는 여성일수록 이 외모에 타격을 주려는 시선도 있는 법이다. 낄낄대며 나경원의 삭발에 관심이 쏠리는 모습도 불편하다. 여성의 삭발은 남성보다 훨씬 전복적이다. 1989년 영화 <아제 아제 바라아제> 촬영을 위해 강수연이 삭발했을 때 상당한 화제였다. 그는 ‘삭발 투혼’의 연기를 보여줬다고 평가받았다. 1995년 옥소리 역시 <카루나>에서 비구니 역을 위해 삭발했다. 머리를 밀며 그는 눈물을 쏟았다. 여성의 외적 아름다움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머리카락을 여성 배우가 모두 잘라낼 때 이는 ‘투혼’으로 바라본다. 여성의 삭발이 가지는 의미가 남성과 다르듯, 여성이 옷을 벗는 투쟁도 남성의 경우와 다르다. 사회적으로 최소한의 체면을 만들어주는 의복을 걷어낸 몸으로 대항함으로써 희롱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 쉬운 여성의 몸을 투쟁의 몸으로 전환시킨다. 여성이 투쟁의 방식으로 옷을 벗을 때 그 몸은 가리는 몸이 아니라 두려움 없는 몸이 된다. 단식이나 상의 탈의는 그야말로 ‘가진 게 몸뚱이뿐’인 사람들이 선택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이들의 언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을 때, 몸 그 자체만이 발화도구가 된다. 이때 몸은 비유로서의 몸이 아니다. 머리를 밀고 곡기를 끊고 옷을 벗으며 온몸을 목소리로 전환시킨다. 더는 잃을 게 없는 사람들이 몸을 투쟁의 도구이자 주체로 활용한다면,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자신이 가진 것을 잃기 싫어서 몸을 활용했을 뿐이다. 거의 중년 여성으로 구성된 도로공사 요금수납원들이 점거농성 중 윗옷을 벗었을 때 역사의 시간은 43년 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돌아갔다. 1995년 출간된 신경숙의 <외딴방>에 등장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옷을 벗고 외치던 목소리도 들렸다. 2013년 밀양 송전탑 반대를 위해 옷을 벗은 고령의 여성들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대법원 판결까지 받은 합법적인 고용을 위해서도 여성들이 옷을 벗고 외쳐야 하는 상황을 ‘촛불’ 이후에도 보고 있다. 오늘날은 43년 전처럼 옷을 벗어던진 여성 노동자들에게 오물을 뿌리진 않았으나 그 순간 카메라를 들이대며 히죽거리는 폭력적 눈이 있었다. 도로공사 요금수납원들은 원래의 위치에서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싶을 뿐이다. 사법부도 이들의 목소리가 옳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톨게이트 아줌마’들이 ‘정규직 시켜달라고’ 억지를 부리는 줄 안다. 이 투쟁은 또다시 역사가 될 것이다. 싸우는 여자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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