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다른 변호사들보다 아주 조금 더 노동법을 공부했다는 것 때문에, 사무실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노동문제가 있을 때 내 말발이 먹히는 편이다. 근로계약서를 만들거나 취업규칙을 해석해야 할 때, 법이 바뀌어 규정을 변경해야 할 때 최종적인 검토도 한다. 처음 법인을 만들 때부터 취업규칙과 각종 규정을 만들어두기는 했지만 그동안은 신고 의무가 없어서 크게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가 지난여름 직원이 늘어 신고 의무가 생기기도 하고 법이 많이 바뀌기도 해서 6년 만에 처음으로 취업규칙을 손보게 됐다. 고용노동부 모범 취업규칙(안)을 내려받아 기존의 우리 취업규칙과 비교해보았더니 의외로 기준에 못 미치는 규정이 많았다. 고용노동부 모범안에 가까운(가깝다고 생각한) 취업규칙 전면개정안을 만들고 전체 근로자에게 회람한 후 신고를 했다. 그런데 며칠 후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서 취업규칙 변경 명령이 왔다. 무려 5개 항목에서 ‘변경’ 명령을, 1개 항목에서 ‘개선’ 지적을 받았다. 심지어 새로 바뀐 직장 내 괴롭힘 조사 절차에 관한 부분도 항목에 포함돼 있다. 고용노동부 직장 내 괴롭힘 매뉴얼 ‘검토자’에 내 이름도 포함되어 있는데. 많이 부끄러웠다. 노동법으로 학위를 받고 주석서 집필진이라며 우쭐대고 법률안이나 고용노동부 자료를 감수한다고 잘난 척하던 내가, 정작 자기 사업장의 취업규칙 하나 법에 맞게 못 만들었던 것이다. 공부가 부족하고 덜 꼼꼼해서였겠지만, 아마 더 큰 이유는 내가 사용자의 자리에서 규정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먼저 후배 변호사에게 초안을 만들어보라고 하거나 직원들의 이야기만 들었어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며칠 전 한 모임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내부에서 고충이나 갈등이 발생했을 때 처리에 관한 규정을 만드는 회의였다. 몇 차례 수정된 안이 마지막으로 집행위원회에 올라와 논의가 시작됐다. 원래 아무리 사소한 규정이라 하더라도, 변호사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규정에 관한 회의가 시작되면, 다른 곳에서는 상상도 못할 지적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대한 지적은 물론이고,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 설령 그러한 점이 있더라도 등등이 튀어나온다. 온갖 분쟁에서 경우의 수를 경험한, 경력이 최소 10년은 넘는 변호사가 스무명 넘게 모인 그 회의에서 블랙홀 같은 논의가 시작되려던 찰나, 우리 모두에게 갑자기 ‘현자의 타임’이 찾아왔다. 그 자리에 모인 집행위원들은, 이미 모임 내 다수가 돼 있는 사람이고,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낮은 사람들이라는 사실. 그래서 우리끼리 하는 회의에서 모든 것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결코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비록 우리가 차별이나 괴롭힘의 약자와 피해자 편에 서왔고 노동의 문제를 수없이 다루어왔더라도 그럴 수 있다. 아니, 어쩌면 많이 알아서 그럴 수 있고(있는 놈들이 더하고 아는 놈들이 더하다는 말처럼) 어쩌면 많이 안다고 생각해서 더 그럴 수 있다. 이 정부에서 ‘노동’을 다루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위험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한때는 노동운동에 헌신했고, 더 열악한 노동현장을 많이 경험했으며, 수많은 노동사건을 다루어왔거나 노동법이나 노사관계로 높은 학위를 했고, 노동계의 생리와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는 분들이 어느 때보다 많은 정부이니 말이다. 모두가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난 2년 반 동안 적잖은 진전이 있었다고 본다. 하지만 그분들도 이제 더 이상 컴컴하고 위험한 작업장에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니다. 크레인이나 높은 건물 위에 올라가야 겨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며, 노동조합 결성은커녕 1시간짜리 점심시간도 눈치 보며 써야 하는 자리에 있지도 않다. 그렇다보니 혹시 놓치고 있는 것이 없는지, 임기 절반에서라도 꼭 돌아보시기 바란다. 아, 엉터리 취업규칙이나 만들면서 노동(법)전문가를 참칭하는 주제에, 오늘도 걱정이 지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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