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승
논설위원
아베 정부가 한국에 수출규제를 한 지 11일로 100일이 된다. 아베 정부가 지난 7월 초 수출규제 조처를 발표하자 한국의 보수언론들은 마치 한국 경제가 망할 것처럼 보도했다. 반도체 공장이 한달 안에 멈춰 서고 국내 기업의 피해가 일본의 300배를 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베 정부가 수출규제에 이어 금융보복에 나서면 ‘제2의 외환위기’를 맞게 될 것이라고도 했다.
하지만 지난 100일 동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되레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로 우리 기업이 직접적 피해를 봤다는 보고는 아직까지 한건도 없다. 물론 여전히 불확실성이 크다. 아베 정부가 또 무슨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긴장의 끈을 놓지 말고 만반의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망외의 소득도 생겼다.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소재·부품·장비산업의 지나친 대외 의존도가 부를 수 있는 위험을 깨달았다. 그동안 추진해온 정책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보완하는 계기가 됐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상생·협력 분위기도 조성되고 있다. 반도체 소재의 국산화 성공 사례들도 들려온다.
반면 아베 정부가 무역보복으로 수입규제가 아닌 수출규제를 하다 보니 일본 기업들의 불만이 크다. 일본의 7~8월 한국 수출이 전년 동기 대비 8.1% 감소했다. 한국의 일본 수출 감소율 3.5%의 두배가 넘는다. 자승자박인 셈이다. 일본 기업들은 우회수출 등으로 수출규제를 피해 가고 있다. 주요 고객인 한국 기업들을 놓치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구책이다.
아베 정부의 수출규제는 우리 국민의 분노를 촉발했고 일본 제품 불매운동에 불을 붙였다. 일본의 관련 산업이 직격탄을 맞고 있다. 특히 관광 분야의 피해가 크다. 일본정부관광국(JNTO) 통계를 보면, 일본을 찾은 한국 관광객이 7월에 전년 동월 대비 7.6%, 8월엔 48% 감소했다. 8월 통계가 나온 지난달 19일 일본의 주요 신문들이 1면 머리기사로 다뤘다. 그만큼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메이드 인 재팬’의 상징인 일본 승용차의 9월 한국 판매는 60% 감소했다. 수입차 시장 점유율이 1년 새 15.9%에서 5.5%로 축소됐다. 일본 맥주의 9월 수입액은 6천달러(약 700만원)로 99.9% 감소했다. 사실상 수입이 중단된 셈이다.
왜 이런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걸까? 아베 정부가 여러가지 오판을 했기 때문이다.
아베 정부가 수출규제를 발표했을 때 오랜 시간 치밀한 준비 끝에 나온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많이 부풀려진 것 같다. 아베 정부는 일본 내 ‘반한 감정’을 등에 업고 무역을 무기로 국내 정치와 외교 문제를 풀려고 했다. 무리수였다. 반도체 소재 수출을 중단하면 한국이 바로 두 손 들고 나올 것으로 판단한 듯하다. 잘못된 정보를 입력받은 것 같다. 처음부터 스텝이 꼬일 수밖에 없었다.
수입규제가 아닌 수출규제로 무역보복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미-중 무역분쟁의 핵심도 관세와 환율을 통한 수입규제다. 그런데도 아베 정부는 엉뚱하게 수출규제를 들이밀었다. 수출규제는 상대국뿐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까지 흔든다. 한국의 반도체 생산이 차질을 빚으면 세계 전자산업이 대혼란에 빠진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언론들이 “가망 없는 무역전쟁을 중단하라”고 아베 정부에 경고한 이유다.
둘째, 아베 정부가 한국을 너무 얕잡아 봤다. 일본의 경제력이 한국을 앞서는 게 사실이지만 한국 경제도 그동안 급속히 성장했다. 더 이상 일본에 호락호락 당할 상대가 아니다.
셋째, 우리 국민의 단호하면서도 성숙한 대응이 아베 정부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불매운동 초기 아베 정부는 “이번에도 얼마 못 갈 것”이라고 폄하했다. 과거와 달리 이렇게까지 확산될 줄은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럼에도 한-일 관계가 이대로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과 일본은 그동안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점을 활용한 분업과 협업으로 ‘윈-윈’을 해왔다. 양국 관계 악화는 모두 손해다. 일본의 양심적 시민사회뿐 아니라 보수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한국과 함께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두개의 변곡점이 다가오고 있다. 10월22일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과 11월22일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일이다. 우리 정부가 지렛대로 활용할 기회다. 원칙을 지키되 외교적 협상력을 높일 때다.
js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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