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영
예술사회학 연구자
공개적으로 힘든 일을 겪으면서도 정작 당사자는 내색하지 않거나 꾸준히 제 일상을 살아갈 때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잘 견디는 줄’ 착각한다. 밝아서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잘 견디는 줄 알았다…. 오히려 이러한 생각은 ‘피해자다움’에 대한 편견과 맞닿아 있다. 힘든 일을 겪는 사람은 이러이러한 태도를 보일 거야, 라는 공식에서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부당한 일을 겪는 사람을 대할 때, 그의 반응을 보지 말고 그 부당한 행위 자체로 시선을 돌렸으면 좋겠다. 설사 잘 견딘다 해도 그의 견딤이 부당한 행위를 합리화하진 못한다.
흔히 밝은 사람들은 그 밝음을 위해 내면에서 사용하는 에너지가 있다. 제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을 환하게 비추기 위해서는 당연히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그 누구도 ‘밝아서 괜찮은’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의 ‘밝음’을 통해 다른 사람이 위로받고 싶을 뿐이다.
11년 전 최진실이 세상을 떠났다. 10월은 최진실이 떠난 달이었는데 이제 설리(최진리)도 떠난 달이다. 설리에 대해 우리는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이 있다. 우리가 모르는 다른 맥락이 있겠지만, 적어도 그의 짧은 삶에 많은 사회적 폭력이 있었음을 모른 척할 수 없다. 그 폭력을 죽음과 온전히 떼어놓긴 어렵다.
남성 연예인은 각종 차별 발언과 역겨운 혐오 발언을 쏟아내고도 남성연대의 보호를 받으며 대체로 무탈하다. 그러나 휘핑크림을 입안에 뿌리는 영상을 찍은 여성은 광기 어린 공격에 시달리고, 브래지어를 하지 않으면 문화적으로 재판대에 오른다. 심지어 페미니즘 책을 읽었다고, 다른 여성을 지지한다고 욕을 먹는다.
미온적으로나마 설리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더 적극적으로 지지하지 못해 죄책감을 가진다면, 그를 놀리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죽음마저 놀린다. 사망보고서가 유출되고 일부 언론의 선정적인 속보가 있었다. 죽음을 대하는 끝없는 무례가 이어진다. 애도의 사회화는 최소한의 운동이며 최선의 윤리일 것이다.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서 적어도 두 가지는 실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째는 여성의 죽음이 가십화되는 현상에 맞서야 한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부고 소식을 가십처럼 쓴 언론이 있었다. 둘째는 수치를 모르는 이들에게 어떻게 수치를 알려줄지에 대한 고민이다. 지금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정작 어떤 생각을 할까. 그동안 언론이 어떻게 폭력에 참여했는지 망각해주지 않을 것이다.
괴롭힘을 오락으로 여기며 여성을 ‘사람 아닌 것’으로 몰고 가면서 한쪽에서는 사람 아닌 것을 두고 ‘리얼돌’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부른다. 이 사회는 지금 너무 망가졌다. 소비재이자 공공재로 여성을 관음하며 자신의 살아 있음을 위로하는 폭력 사회이다. 끔찍한 여성 혐오 사회일수록 여성은 죽음으로써 가장 환대받는다. 생전에 그토록 악플 재생산을 유도하던 언론이 이제는 열심히 그를 칭송한다. 살아 있는 여성은 인형이 되길 원하고, 인형은 ‘리얼’의 반열에 들어온다. 여성은 ‘내가 사람이다’를 말하기 위해 싸워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성의 인격을 침해하는 섹스 인형을 산업으로 부추기는 국회의원을 보니 이 사회가 여성을 ‘무엇’으로 생각하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과거에 외화벌이를 목적으로 미군을 위한 성매매를 장려하더니 이제는 시대에 발맞추어 섹스 인형으로 돈 벌 궁리를 한다. 여성은 그저 돈벌이의 자원이다.
‘리얼’ 여성을 혐오하면서 ‘리얼’ 인형을 끌어 붙들고 폭력적 욕정을 쏟아내는 행태를 적극 장려하는 이 사회에서 악플 방지법은 기만이다. 전혀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차별을 조장하면서 악플을 방지하겠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산업적 측면에서 섹스 인형을 키우자고 하는 한편 그 산업 현장에서 ‘리얼’ 인간인 여성은 노동자로서 배제된다. 지금 한국 남성들은, 아니 그 어떤 사람이든 ‘리얼’ 여성의 삶을 아는가. ‘리얼’ 여성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는 상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