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공감세상] 교만을 피하는 법 / 김민식

등록 2019-10-28 17:21수정 2019-10-29 02:39

김민식

<문화방송>(MBC) 드라마 피디

가수가 티브이에서 노래 실력을 뽐낼 기회가 많지 않던 시절, 지상파 방송 가요 순위 프로그램 출연 여부는 인지도와 음반 판매량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번이라도 더, 조금이라도 더 길게 출연하기 위해 매니저들이 제작 회의실 복도에 아침마다 줄을 섰다. 출근하는 피디의 위세는 입궐하는 왕의 행차 같았다.

어떤 선배는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맡게 된 날, 마음속 고이 간직해둔 살생부를 꺼냈다. ‘조연출 시절, 섭외할 때 나를 힘들게 한 매니저가 누구더라?’ ‘인터뷰 촬영 협조 안 해준 그 배우, 소속사가 어디더라?’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맡는 건, ‘절대 반지’를 손에 넣는 것 같다. 누구든 손봐줄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절대 반지’. 멀쩡한 피디가 권력을 손에 넣는 순간, 골룸이 되는 걸 보고 1987년의 여름이 떠올랐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자전거 동아리에서 전국일주를 했다. 가장 아름다운 코스는 동해안 7번 국도였다. 포항에서 속초까지 달리는 동안 오른쪽에는 동해 바다, 왼쪽에는 태백산맥이 펼쳐졌다. 페달을 밟아 언덕을 오르면 눈앞에 바다가 펼쳐지고, 갯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달렸다. 당시엔 동해안에서 서울로 가려면 한계령을 넘어야 했다. 자전거를 타고 설악산을 오르는 데 3시간이 걸렸다. 허벅지 근육이 터지는 줄 알았다. 겨우 정상에 도착하니 한계령 휴게소 주차장에서 동아리 선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너희들 정말 장하다! 한계령을 자전거로 오른 너희 인생에 이제 한계란 없다.” 이따위 드립을 치더니 후배들을 불러다 놓고 단체 기합을 줬다. 왜 그랬을까?

사이클을 타고 한계령을 오르는 건 힘은 들지만 위험하지는 않다. 오르막에서는 속도가 나지 않으니까. 문제는 내리막이다. 고생 끝에 정상에 올랐다는 도취감에 빠져 스피드를 즐기다 보면 급커브 구간에서 바퀴가 밀려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단체 기합을 주며 선배가 말했다. “자전거 타고 산에 오르니까, 신나지? 이 즐거움을 오래도록 지속하려면, 스피드에 대한 욕심을 줄여야 한단다.”

나이 오십이 넘어 그날의 한계령을 떠올릴 때가 많다. 방송사 피디로 일하며 한 방에 훅 가는 이들을 많이 본다. 오랜 세월 무명으로 고생하다 간신히 스타가 되었는데 사고 한 방에 사라진다. 신인 시절은 오르막이다. 사고가 안 난다. 사고 칠 힘도 없고, 사고를 쳐도 아무도 관심이 없다. 문제는 정상에 오른 뒤다. 고생 끝에 떴으니 인생을 좀 즐겨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대형 사고가 터진다. 뜨는 것보다 어려운 건, 뜬 다음 자기 관리다.

한때 골프에 빠진 적이 있다. 미국 유학 중인 아내를 만나러 갔을 때는 휴가 한달 동안 라운딩을 스무번 넘게 나갔다. 양말 신은 부위만 빼고 종아리가 새카맣게 탔다. 아내가 미국에 전지훈련 왔느냐고 했다. 한국에 돌아와 업무에 복귀하고 골프 친다는 소문이 나니까 여기저기서 주말에 라운딩 가자는 연락이 왔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좋은 시간에 티오프를 잡았다고 해서 나가보니 연예제작사 대표나 매니저가 물주였다. 순간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게 곧 나의 약점이로구나.’ 골프를 끊고 주말에 한강에 자전거를 타러 다녔다.

당 태종에게는 위징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평소 직언을 잘하던 그가 죽자 “내가 잘못을 해도, 바로잡아줄 사람이 없으니, 짐은 이제 거울을 잃었다”고 통곡할 정도였다. 당나라를 세운 뒤, 당 태종이 ‘창업과 수성, 어느 쪽이 어려운가?’라는 주제를 두고 이야기를 나눌 때, 위징이 말했다. “창업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일단 나라를 세우고 난 후에 군주에게 교만이 싹트지 않게 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창업은 차라리 쉽다. 욕망을 원동력 삼아 열심히 달리면 된다. 중요한 건 정상에 오른 다음이다. 내리막길에서 달리고 싶은 욕망에 제동을 걸 수 있어야 한다. 오래 지속되는 즐거움을 만드는 길은 거기에 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물에 빠진 늙은 개를 건져주자 벌어진 일 [아침햇발] 1.

물에 빠진 늙은 개를 건져주자 벌어진 일 [아침햇발]

육사 등 없애고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로 단일화해야 [왜냐면] 2.

육사 등 없애고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로 단일화해야 [왜냐면]

우리가 모르는 한덕수 [12월26일 뉴스뷰리핑] 3.

우리가 모르는 한덕수 [12월26일 뉴스뷰리핑]

한덕수가 꿰맞춘 헌법재판관 임명 거부 3가지 논리 [12월27일 뉴스뷰리핑] 4.

한덕수가 꿰맞춘 헌법재판관 임명 거부 3가지 논리 [12월27일 뉴스뷰리핑]

내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설] 5.

내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