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공감세상] 조커와 김지영의 세계 / 손아람

등록 2019-10-30 16:51수정 2019-10-31 07:58

손아람 작가

배트맨으로 분장한 재벌가 상속인 브루스 웨인은 사비를 쏟아부어 끝이 보이지 않는 범죄와의 전쟁을 벌여왔다. 그런데 어쩌다 고담시는 범죄 소굴이 되었나? 영화 <조커>는 그 대답으로 악당의 위치를 바꿔 세운다. 웨인 가문을 정점으로 하는 소득불평등 구조가 원인이었다. 브루스 웨인의 아버지가 가문의 부에 힘입어 정계에 진출할 때, 광대 아서 플렉의 망상 장애 치료는 의료복지 예산 삭감으로 중단된다. 무르익은 폭동의 분위기 속에서 그는 조커로 다시 태어난다. 영화는 구조적 폭력이 불법적 폭력을 재생산한다고 주장한다. 엄격해진 복지제도의 문턱을 넘지 못해 사회적 재활에 실패하고 범죄자 딱지가 붙게 된 목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 할리우드가 조응한 것과 같다. 정치적 과정을 지나치게 단순하고 말초적으로 표현했다는 한계가 있지만, 영화를 느슨한 알레고리로 받아들인 베네치아영화제 심사위원들은 개의치 않았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로서는 처음으로 황금사자상을 받게 된 <조커>는 정작 미국 개봉과 동시에 엄청난 비판에 직면했다.

영화 &lt;조커&gt;. 워너브러더스 누리집 갈무리
영화 <조커>. 워너브러더스 누리집 갈무리

월가 점령 시위 이후 무장봉기가 공공연하게 거론되는 한편으로 총기 범죄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소득불평등이 최대의 정치적 화두인 동시에 저소득층 강력범죄에 시달리는 미국에서 <조커>는 더 이상 알레고리가 아니었다. 미국 사회를 달궈왔던 논쟁이 영화에 대한 반응으로 재현됐다. 폭력이 낳은 폭력이라고 해서 그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최대한 공정하게 말하자면, 이 윤리적 잣대는 지금까지의 영웅물이 적용을 면제받았던 것이다. <조커>는 종반부에서 범죄로 부모님을 잃은 어린 브루스 웨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배트맨의 기원을 연결시킨다. 악당 투페이스의 기원을 연결했던 <다크 나이트>의 종반부가 떠오르는 장면이다. 훗날 조커를 향해 사적 정의를 실현하려는 배트맨을 저지하다 사고를 당한 검사 하비 덴트가 투페이스의 전신이다. 반면 배트맨은 공권력을 농락하는 즉결심판을 일삼으며, 네가 가진 초능력이 뭐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돈”이라고 대답하는 부자다. 배트맨 시리즈는 부유층의 초법적 일탈을 부추기고 정당화한다는 비판을 받지 않았다. 조커의 악은 모방하기 쉽지만 배트맨의 부는 그렇지 않아서일까? 공교롭게도 그 비대칭이 바로 영화 <조커>의 주제다. 부가 쉽게 확산되지 않는 사회에서 악은 쉽게 확산한다는 것.

그러나 <조커>의 진짜 문제는 눈에 보이는 폭력의 잔혹함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차별성이다. 영화는 조커를 괴롭혔던 신체적·사회적 강자인 남성들을 응징하듯 살해하면서 떳떳하게 전시하지만, 납득이 어렵게 무방비로 학살당한 여성들은 화면 뒤로 슬쩍 감춘다. 이 선택은 사회적 인과 구조를 주장하는 영화의 기조를 크게 해쳤다. 불편함을 느낀 관객의 절반을 윤리 논쟁의 반대편으로 떠민 근원이다.

영화 &lt;82년생 김지영&gt;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롯데엔터테인먼트 제공

한국에서는 더 격렬한 대립 구도 속에 놓인 작품이 <조커>를 덮었다. <82년생 김지영>은 정반대편에 위치한 듯하면서도 <조커>와 닮은점이 꽤 많은 영화다. 두 주인공을 향한 사회적 압력은 정신적 장애로 드러난다. 웨인 가문이 고담시의 보안관이자 범죄의 구조적 원인이듯, 김지영의 조력자인 남편은 그녀가 처한 상황의 구조적 가해자다. 미국에서 <조커>가 알레고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듯 한국에서의 <82년생 김지영>도 마찬가지다. 영화를 거리 두고 볼 수 있었던 미국 바깥 관객들이 <조커>에 더 우호적이었듯, <82년생 김지영> 역시 국외에서는 이견 없는 호응 속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다른 점도 있다. 김지영은 상업영화에서는 드물게 정적인 인물이다. 조커와 달리 김지영은 문제를 일으키거나 문제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대신, 그 자체 문제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스스로의 문제를 영화 후반까지 분명하게 자각하지도 못한다. 이제 두 영화로 ‘다른 그림 찾기’를 해보자. 한쪽에는 금기를 실행하는 존재를 불편하게 여기는 세계가, 다른 쪽에는 존재의 자각을 불편한 금기로 여기는 세계가 숨어 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물에 빠진 늙은 개를 건져주자 벌어진 일 [아침햇발] 1.

물에 빠진 늙은 개를 건져주자 벌어진 일 [아침햇발]

육사 등 없애고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로 단일화해야 [왜냐면] 2.

육사 등 없애고 국방부 산하 사관학교로 단일화해야 [왜냐면]

우리가 모르는 한덕수 [12월26일 뉴스뷰리핑] 3.

우리가 모르는 한덕수 [12월26일 뉴스뷰리핑]

한덕수가 꿰맞춘 헌법재판관 임명 거부 3가지 논리 [12월27일 뉴스뷰리핑] 4.

한덕수가 꿰맞춘 헌법재판관 임명 거부 3가지 논리 [12월27일 뉴스뷰리핑]

내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설] 5.

내란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