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 ㅣ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더니, 이쪽 동네 악마는 시행령에 숨어 있다. 계약직으로 2년 일하면 무기계약으로 간주되는 기간제법도 마찬가지여서, 시행령에 여러 예외를 숨기고 있다. 그중에 “1주 동안 15시간 미만 일하기로 한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이 법을 피하려는 사람들은 근로시간을 억지로 주 15시간 아래로 맞추려고 노력한다. 하나의 일자리를 여러 명이 담당하게 쪼개거나 휴식시간을 늘리면 간단하다.
경마장 사건도 그런 경우였다. 주말에 일하는 ‘시간제’ 응급구조사들의 1주 근무시간이 16시간 정도였는데, 기간제법 시행으로 2년밖에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점심시간뿐 아니라 오전과 오후에 각각 20분씩 휴게시간을 넣어 계약서를 바꿨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나와 토요일과 일요일을 일해도 15시간이 안 된다. 누가 봐도 어색한 근로시간 14시간40분. 법 적용을 회피하기 위한 가짜 휴게시간이라고 했지만, 법원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 적용을 받게 되면 2년마다 잘리게 되기 때문에 근로자들도 “더 오래 일하기 위해서” 계약서 변경에 동의했고 오전과 오후에 20분씩 더 쉴 수 있으니 더 이익이 됐다는 것이다. 회사 쪽은 늘 “근로자에게도 유리하다, 근로자가 스스로 선택했다”는 식이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언제 응급사고가 일어날지 몰라서 점심시간도 반은 대기상태인데, 20분 휴식이라니. 변변한 휴게실도 없고 경마장에서 전철역까지 가기도 빠듯한 시간이니 외출이나 개인적 용무는 언감생심인, 그저 명목뿐인 휴게시간인데. 만약 판사들에게 오전·오후에 20분씩 쉬라고 하고 어디든지 자유롭게 가라면서 근무시간이 그만큼 준 거 아니냐고 하면, 받아들일까.
단순히 계약서에 언제부터 언제까지를 근로시간으로 하기로 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근로시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근로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24시간 중 자기 마음대로 계획하고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잠시 유보하고 회사에 제공해 그 처분을 맡긴 시간. 그래서 그 시간 동안은 어디 다른 곳에 갈 수도 없고 마음대로 할 수 없으며, 그 시간 동안은 회사가 시키는 일을 하고 회사가 정한 규칙에 맞추어 생활해야 하고 그것을 어기면 징계도 받아야 하는 시간이 바로 근로시간이다. 그래서 근로시간의 문제는 ‘시간주권’에 관한 것이고, 일정 시간 자기 노동에 대한 처분을 맡긴 대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되도록 그 시간을 줄여 스스로를 위해 계획하고 처분할 시간을 늘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노동법의 역사는 근로시간을 줄여온 역사라고 배웠다.
아무리 회사가 필요해도 주 52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 처분에 맡길 수 없다는 ‘주 52시간제’는, 과로를 방지하고 일자리를 나누는 것을 넘어 노동자의 시간주권을 확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회사의 필요에 따라 매주 근로시간을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게 하는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지나친 과로와 공짜 야근을 방치하게 된다는 것도 문제지만, 절대 근로시간뿐 아니라 근로자의 시간 중 언제 얼마를 노동에 투여할 것인지에 관한 시간주권을 사용자에게 더 많이 넘기게 된다는 점에서 애써 도입한 제도 취지에 너무나 반한다. 시장에 충격이 크다거나 경제가 어려워져 다소 보완해야 한다 하더라도 최소화해야 하는 까닭이다.
며칠 전 어느 위원회는 4차 산업혁명에 대비해 정부를 향한 권고 중 첫번째로 주 52시간제 등 노동제도 개선을 꼽았다고 한다. “노동시간이 아닌 오직 성과만으로 평가받고 해고와 이직이 일상”인 ‘인재’가 혁신의 주체이기 때문이란다. 위원장은 “주 52시간제는 개인의 일할 권리를 국가가 빼앗는 것”이라는 말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인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시간주권이고, 시간주권은 오히려 엄격한 근로시간제도에서 온다. 근로시간법제가 문제 삼는 ‘노동’은 ‘하는’ 것이 아니라 ‘시키는’ 것이고, 혁신은 언제나 인간이 주권자로 계획하고 스스로 처분할 수 있는 시간에서 왔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