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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공감세상] 병신이 여기에 있다 / 김원영

등록 2019-11-11 18:27수정 2019-11-12 14:44

김원영
변호사·<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저자

지난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고성이 오가던 가운데, 여상규 법사위원장이 다른 위원에게 말했다. “웃기고 있네. 병신 같은 게….”

‘병신’이라는 말은 사랑받는(?) 한국어다. 화나도 쓰고, 장난으로도 쓴다. “너 병신이냐?”는 말은 판사 출신 국회의원뿐 아니라 중학생들도 쓴다. 이 말이 진정 힘을 발휘하는 맥락은 “감히 네가?”라는, 상대의 자격을 문제 삼는 순간이다. 병신이라는 욕은 상대의 본질에 대한 공격이 아니다. 자신과의 상대적 위치에 입각한 자격 평가다. 어린 시절 동네 친구들과 끝까지 말싸움에서 지지 않았을 때, 몰지각한 동네 어른에게 내가 들었던 욕은 “병신이 육갑을 떤다”였다.

올 한해 나는 연극 무대에 설 기회가 있었다. 본래 좋아하는 일이었지만, 실제로 하기는 어려운 여건이었고 무엇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특히 이번 공연에서는 휠체어를 버리고 바닥으로 내려오는 장면이 있었다. 나의 동료들과 나는 그것이 일종의 ‘춤’이 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 장면을 결정했을 때 우선 머릿속에 떠오른 말은, 일종의 “웃기고 있네. 병신 같은 게…”였다. 관객 중 누군가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힐링과 위로, 응원의 말들이 사방에서 소비되지만 진정한 위안과 용기는, 호의적이고 ‘정확한’ 비평으로부터 온다. 당신이 평생 열등감을 품으며 선뜻 드러내지 못하는 어떤 사적인 요소를 지인에게 털어놓았다고 가정해보자. ㄱ은 그것을 알자마자 당신을 떠나고, ㄴ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당신을 위로한다. ㄱ에게 우리는 상처를 받고, ㄴ에게서도 용기와 위안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는 겉으로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취업에 실패하거나 성소수자임을 커밍아웃을 했을 때, 장애를 가진 아이를 출산했을 때, 우리는 명절의 일가친척들이 모이는 자리나 동창회에 나가지 않기로 결심한다. 동창회나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는 ㄱ이나 ㄴ과 같은 사람이 여럿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ㄷ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그가 삶과 인간에 대한 훌륭하고 정확한 비평가라고 해보자. 그는 당신이 털어놓은 사실과 당신의 다른 면모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중요한 가치, 삶의 태도에 비추어 그 사실이 당신에게 진정한 흠이나 오류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진심으로 말한다. 대중이 외면해도 훌륭한 소설이나 시, 영화가 존재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비평가처럼, 다수의 사람들이 가치 없다고 여기는 우리 삶의 어떤 경험이 지닌 가치의 가능성을 ㄷ은 해명할 것이다. 그러니까 장애, 낮은 학벌이나 사회적 지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부모님 등의 존재가 당신의 어떠한 태도와 결합한다면, 충분히 훌륭한 것임을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정확하고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비평가 말이다.

이런 비평가들은 어디에 얼마나 있을까? 최근에 젊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나는 이들의 얼굴을 만날 때가 종종 있다. 미술, 연극, 무용 등 각종 예술계에서 어떤 예술가들은, 발달장애가 있는 작가들의 그림에서, 언어장애가 있는 배우의 연기에서, 노인들의 무용에서 가치를 발견하며, 발견하는 작업에 함께 참여하는 중이다. 내가 공연을 했던 것도 이들과 함께해서였다. 공연을 끝냈을 때 어떤 관객은 “직선과 곡선의 조화가 좋았다”고 말해주었다. 어떤 관객은 노래를 만들어 보내주었다. 부정적으로 본 관객들도 물론 많았겠지만, 적어도 ‘자격’을 문제 삼는 이는 없으리라는 확신을 나는 가지게 되었다.

우리 삶의 각 영역에는 훌륭한 비평가들이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이 비평가들의 지지와 해석에 힘입어, 세상이 자격을 문제 삼던 바로 그 특성을 용기 있고 유쾌하게 드러내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이를테면 저 법사위원장의 입 앞에서, 휠체어에서 바닥으로 내려와 춤을 추고, 흰 지팡이로 위원장의 탁자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여기에 당신이 말하는 병신이 있다”고 외치는 장면을 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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