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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장석준, 그래도 진보정치] 남 이야기 같지 않은 칠레 소식

등록 2019-11-14 18:22수정 2019-11-15 02:37

장석준ㅣ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지난달 초부터 칠레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발단은 대중교통 요금 인상 결정이었다. 당국이 지하철 요금을 30페소 인상한다고 발표하자 수도 산티아고의 중고등학생들이 항의 시위를 시작했다. 학생들이 지하철역을 점거하자 경찰은 폭력을 휘둘렀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했다. 10월25일에는 칠레 인구의 10분의 1인 100만명이 거리를 채웠고, 급기야는 19명의 사망자까지 발생했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비상사태를 선포했지만, 11월 중순인 지금까지도 시위는 그칠 줄 모른다.

30페소면 50원이 채 안 된다. 이 정도 인상에 칠레인들은 왜 이렇게까지 반발하는가? 칠레 시민들은 30페소가 아니라 ‘30년’이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지난 30년간 칠레를 지배해온 질서를 뒤집지 않으면 더는 희망이 없기에 투쟁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도대체 그동안 칠레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30년 전이라면 1989년이다. 1980년대에 칠레에서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군부독재에 맞서는 민주화 투쟁이 벌어졌다. 그러다 1989년에 마침내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이때 중도우파 기독교민주당과 중도좌파 사회당이 만든 선거연합 콘세르타시온이 승리해 칠레는 한국보다 일찍 수평적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콘세르타시온은 이후 21년 동안 계속 집권했다. 그사이에 칠레는 군부독재 잔재를 조금씩 지웠고, 2010년에는 남미 최초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민중에게는 바뀐 것보다 바뀌지 않은 게 더 많았다. 콘세르타시온 정부는 군부독재 시절에 구축된 시장지상주의 체제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사유화된 연금 제도도 그대로 뒀고, 노동조합운동을 가로막는 노동악법도 바꾸지 않았으며, 남은 복지제도마저 망가뜨리는 긴축 재정도 유지했다. 그 탓에 칠레는 상위 1%가 소득의 33%를 차지하는 극심한 불평등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칠레 민중이 이런 현실에 항의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민주화 세력에 대한 실망감은 2010년 대선에서 이미 확인됐다. 이때 민주화 이후 최초로 콘세르타시온이 군부독재 계승 세력인 피녜라 후보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콘세르타시온이 심판받았다고 하여 민중이 우파 정부를 신임한 것은 아니었다. 곧바로 교육 공공성 강화를 요구하는 학생운동이 폭발했고, 그 열기 속에서 민주화 세력 연합은 ‘새로운 다수’로 이름을 바꿔 정권 탈환에 성공했다.

학생운동 덕택에 다시 집권한 민주화 세력은 대학 교육을 부분 무상화하는 등 이전보다는 사회 개혁에 신경을 썼다. 그러나 양극화를 치유할 정도는 아니었고, ‘새로운 다수’는 2017년 대선에서 또다시 정권을 피녜라에게 넘겨주었다. ‘새로운 다수’에 실망한 학생운동 세대는 ‘확대전선’이라는 좌파 정당연합을 따로 건설해 이 선거에서 바람을 일으켰다. 지난 30년간 칠레 정치를 독점하며 양극화를 방치하던 양대 진영에 처음으로 무시 못할 도전자가 등장한 것이다.

이런 역사적 과정의 끝에 현재의 거대한 대중투쟁이 있다. 처음 듣는 남의 나라 이야기라 낯설 수도 있지만, 몇몇 대목에 최근 우리 역사를 대입하면 의외로 낯익게 다가오기도 한다. 가령 콘세르타시온의 자리에 한국의 ‘민주’ 진영을, 우파 정부에 맞섰던 2010년대 학생운동에 2016~17년 촛불항쟁을 넣어보자. 항쟁의 결과로 들어선 ‘민주’ 정부가 사회 개혁에 미적대는 모습은 영락없는 지금 우리 상황 아닌가.

그렇기에 칠레 시위에서 두려움을 느껴야 할 이들은 칠레 정치인들만이 아니다. 기성 민주주의가 경제사회 불평등을 해결하지 못하는 곳 어디에서든 이런 폭발은 재연될 것이다. 칠레에서 처음 실험을 거친 신자유주의가 이후 다른 나라에 예외 없이 반복됐듯이 이 폭발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의 불길은 이제껏 가장 빈번히 ‘민주주의’를 이야기했던 정치인들도 결코 비껴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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