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영ㅣ예술사회학 연구자
얼마 전 티브이 화면을 등지고 앉아 뉴스를 건성으로 들으며 일하다가 어떤 단어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았다.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돌고 있다는 혐오표현을 소개했다. 세입자, 빌라 거주자, 임대 아파트 거주자를 ‘거지’라고 부르는 멸시의 언어였다. 또한 부모의 소득을 기준으로 누군가는 ‘벌레’로 불렸다. 굳이 그 표현을 자세히 적고 싶지도 않다.
초등학교 때 어느 날 아침이 생각난다. 그 전날 나는 친구들을 우리 집에 데려와서 놀았다. 학교에서 우리 반 반장이 큰 소리로 내게 말했다. “야, 너 지하실에 산다며? 우리 집은 창고로나 쓰는 그 지하실!” 마침 그때는 내가 아침마다 반 아이들에게 문제를 내주고 풀어주는 아침학습 시간이었다. 나는 칠판을 등진 채로 40명의 반 아이들을 마주하고 혼자 서 있는 상태였다. 그 순간 반장 아이의 ‘지하실’ 발언이 갑자기 튀어나왔다. 전날 우리 집에 놀러 왔던 친구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고 짓궂은 남자아이들은 놀려대기 시작했다. 내가 그때 뭔가 말을 하긴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냥 개의치 않고 앞에서 문제를 풀어줬던 기억만 난다.
반장 아이는 괜찮은 친구였고 나중에 고등학교 입학 직전에도 만난 적 있다. 배려심 있고 똘똘한 아이였다. 단지 어려서 그때는 철이 없었을 뿐이다. 내가 당시 했던 생각은 나를 놀리는 반장에 대한 불쾌감, 당혹감, 이런 게 아니었다. 아…. 지하실을 ‘창고’로 생각하는구나. 이거였다. 나는 반지하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 집에 오기 전에 그런 구조의 집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내 기준에서는 ‘반지하’가 아니라, 계단을 올라가면 수세식 화장실이 있는 양옥집이었다. 그 집으로 이사 올 때 오히려 빨간 벽돌 집이 마음에 들어 좋아했었다. 서로 살아본 공간의 역사가 다르니 생각하는 게 달랐다. 이제는 ‘양옥집’이라는 말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이처럼 거주지에 대한 차별 발언은 딱히 요즘 아이들의 문제라고 보긴 어렵다. 그러나 거지나 벌레라는 이름을 붙여 자세하고 꼼꼼하게 분류하는 모습이 놀라웠다. 그런 방식의 분류를 어디서 배웠겠는가. 뒤이어 나오는 어른들의 인터뷰는 이 초등학생들의 혐오발화 발원지가 어딘지 알려줬다. 다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래도 부모 입장에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며 거주지에 따라 아이들의 인간관계를 분리하는 제 마음을 합리화했다.
나는 뉴스를 통해 알게 된 이 혐오표현보다 이러한 현상을 전하는 방식에서 묘한 불편함을 느낀다. 오히려 이런 뉴스가 혐오표현을 가르쳐주며 더 유통시키는 건 아닐까 솔직히 우려가 된다. 혐오발화는 ‘요즘 초등학생들’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어른들이 쌓아 올린 흉물스러운 초상이다. 사는 집을 놓고 이러쿵저러쿵하는 어른의 언어가 아이들에게도 닿기 마련이다. 아파트 브랜드로 사람의 격을 따지려 드는 많은 사람의 모습이 어린아이들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을 뿐이다.
또한 이런 소식을 들을 때 누군가는 더욱 위축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현재 월세로 살고 있는 나는 세입자라는 신분에 개의치 않고 살지만, 만약 내가 자식이 있다면 상당한 공포를 느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내 자식이 낙인의 대상이 되지 않게 하려고 내 집 마련을 위해 발버둥 칠지 모른다. 나는 그럴 리 없다고 감히 장담하는 건 위험하다. 바로 그런 식으로 평범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다’며 이 차별적 구조에 가담한다. 거지나 벌레가 되지 않기 위해.
특정 사람들을 향해 정확하게 언어로 표현된 낙인은 공포를 준다. ‘지하실’에 산다고 나를 놀리던 친구의 행동이 내게 큰 타격을 주지 않았던 건 아마도 함부로 나의 존재를 호명하는 언어가 유통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브랜드를 따지는 만큼 누군가를 낙인찍는 언어도 함께 성장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타인이 ‘벌레’가 되었는지 생각해보자. ‘요즘 초등학생들’에게 혀를 내두를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