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준 ㅣ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기획위원
홍콩 민주화 시위가 반년 넘게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이 전투는 지금 홍콩 현지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긴 전선이 동아시아를 가로지르고 있으며, 여기에는 대한민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대학가 곳곳에서 광주와 촛불 정신을 떠올리며 홍콩 시위를 지지하는 대자보를 붙이려는 학생들과 이를 방해하려는 일부 중국 유학생들이 충돌하고 있다.
이 광경은 현재 동아시아에서 ‘진보’와 ‘좌파’,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같은 가치와 이상이 처한 복잡한 상황을 선명히 드러낸다. 가령 ‘민주적 사회주의자’라는 이름의 정의당 당원 모임이 써 붙인 대자보는 “우리는 인민의 억압자들을 때리는 인민의 주먹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용문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중국 인민해방군 원수였던 펑더화이의 발언이다. 이 대자보는 또한 “다름을 인정하며 같음을 구한다”는 저우언라이의 말,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는 마오쩌둥의 말도 인용한다. ‘민주적 사회주의자’ 모임은 이런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의 언어를 무기 삼아 홍콩 투쟁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중국 정부의 강경 대응을 비판한다.
거대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중국혁명은 분명 20세기 인류의 위대한 성취였다. 거기에는 온갖 이상과 열망, 가능성이 뒤섞여 있었다. 인간 해방을 위해서는 수천년 묵은 질서도 파괴하고 새로 세울 수 있다는 의지가 살아 꿈틀댔고, 구 지배층과 제국주의 열강을 몰아낸 자리에 인민이 주인 되는 민주주의 질서를 수립하겠다는 포부도 확연했다. ‘민주적 사회주의자’ 모임이 대자보에서 인용한 어구들은 중국혁명이 이렇듯 다양한 모색과 가능성을 품고 있던 시기의 정신을 대변한다.
그러나 혁명 세력의 집권 이후 오로지 한가지 흐름이 다른 가능성들을 압도하며 대세가 됐다. 그것은 국가주의였다. 소련에서 수립된 스탈린주의 질서가 ‘사회주의’와 동일시되며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곳곳에 이식됐다. 물론 이는 각 사회의 토양에 맞게 진화를 거듭했지만, 국가 권력이 내건 목표 아래 사회의 다른 모든 부분이 동원 대상이 된다는 국가주의의 골격만큼은 변함없이 유지됐다.
특히 오늘날 중국에서는 개혁개방 이후 도입된 자본주의가 이러한 국가주의와 최악의 조합을 이루고 있다. 이 기묘한 혼종적 체제는 혁명의 유산, 그중에서도 특히 반제국주의 수사를 동원해, 국가 권력에 대한 사회 세력들의 도전을 차단한다. 민주화를 요구하든 민주노동조합을 건설하든 공산당 통치에 맞서는 모든 도전자는 지난 세기에 중국을 수렁에 빠뜨렸던 서방 제국주의의 동조자로 치부된다.
이런 상황에서 동아시아 각 나라의 진보 세력은 이제 ‘진보’나 ‘좌파’의 의미를 새롭게 정리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이런 말들을 내걸고 시작된 체제라 하더라도 지금 결국 국가주의의 여러 변종으로 귀결되고 말았다면, 이는 철저한 비판과 단절, 전환의 대상일 뿐이다. 인민들 자신의 목소리가 다시금 모든 이상과 가치의 중심에 놓여야 한다. 여기에는 물론 홍콩 시위 대중의 함성도 포함된다. 이들이 외치는 “행정장관 직선제” 등의 요구는 결코 서방 제국주의 교리의 추종이나 부화뇌동이라 치부될 수 없다. 주거 문제 같은 ‘자본주의 실패’ 시대의 비극을 인민이 실제로 주인 되는 민주주의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전 지구적 공통 시대정신의 한 표현이다.
21세기 동아시아에서 진보 세력은 이러한 새로운 기준에 따라 재구성되어야 한다. 즉, 홍콩 항쟁은 지난 세기 좌파의 여정을 마감하고 새로 시작되는 여정의 공통 정신을 밝혀주는 분기점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는 지난 세기 여정의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 최초의 현대 소설이라 평가받는 <광인일기>에서 작가 루쉰이 애타게 찾은 것은 서양을 뒤따르는 부유함도 아니었고, 강대한 국가도 아니었다. 다만 “참된 사람”이었다. ‘참된 사람’이고자 몸부림치는 시민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