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식 ㅣ <문화방송>(MBC) 드라마 피디
올 한 해 책을 200권 읽었다. 나는 고민이 생길 때마다 책 속에서 답을 찾는다. 독서는 답을 찾는 여정인데, 진짜 좋은 책은 답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2019년에 나온 책 중 내게 가장 깊은 질문을 남긴 책은 이철승 교수의 <불평등의 세대>다. 책에는 이런 질문이 나온다.
“왜 우리는 386세대와 함께 민주화 여정을 거쳤음에도, 우리의 아이들과 청년들은 더 끔찍한 입시 지옥과 취업 전쟁에서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고 있는가? 왜 민주주의는 공고화되었는데, 우리 사회의 위계 구조는 더 ‘잔인한 계층화와 착취의 기제'들을 발달시켜 왔는가? 왜 여성들은 여전히 입직과 승진, 임금에서 차별받는가?”(79쪽)
내 또래인 386세대는 어려서 식민지나 전쟁을 겪은 산업화 세대에 비해서 운이 좋은 편이다. 대학에서는 민주화 투쟁으로 승리의 경험을 얻었고, 사회에 진출했을 때 외환위기가 터지는데, 이 또한 불행 중 다행이다. 연차가 낮은 신입사원 시절, 비교적 싼 임금 덕분에 구조조정의 칼날을 피했다. 2000년대 들어 세계화와 정보화의 흐름을 타고 한국 기업들이 약진할 때, 윗세대의 빈자리를 386이 차지했다. 신자유주의 여파로 노동시장이 유연화하고 정규직이 사라지는데, 그 와중에도 굳건히 상층부를 차지하고 있는 게 지금의 386세대다.
“노동시장에서 임금 불평등이 나타나는 세 요인은, 첫째 개별 노동자가 속해 있는 기업 조직이 대규모인가 아닌가, 둘째 고용 지위가 정규직인가 비정규직인가, 셋째 사업장에 노조가 존재하는가 여부다.”(위의 책 99쪽)
사다리의 상층부를 차지한 대기업 정규직 50대 부장이 하청업체 비정규직 30대 사원을 상대로 갑질을 하거나, 위험을 외주화한다. 이들이 만든 한국 사회의 위계 구조에서 희생자는 청년과 여성이고, 그 교집합이 바로 젊은 여성이다. 장강명 작가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를 보면, 나라를 떠나 이민을 꿈꾸는 주인공이 바로 젊은 여성이다.
퇴사와 이민을 꿈꾸는 젊은 세대의 속내가 궁금해서 읽은 책이 있다. <그래서 나는 한국을 떠났다>를 보니 젊은 세대는 외국 생활을 동경해서 가는 게 아니라 이곳의 삶이 힘들어 떠난다. 한국에서 대기업을 다닌 어떤 이는 잦은 회식 탓에 개인 시간이 없었다. 평일 저녁 늦게까지 술을 먹고 부족한 잠은 주말에 보충했다. 사표를 던지고 캐나다로 이민 가서 공무원이 되었는데, 지금은 오후 3시 반에 퇴근해서 저녁엔 취미 생활을 즐긴단다.
이민을 떠난 사람들이 어디에서 살든 하나같이 하는 말이 있다. “여기는 야근이 없고, 회식이 없어요.” 한국에서 직장을 다닐 때, 회식 자리에서 술을 안 마신다고 했더니 “술 안 먹을 거면 퇴사해!”라는 부장의 말에 다음날 사표를 던지고 이민을 떠났다는 사람도 있다. 이주노동자로 사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이민을 선택하는 걸 보니, 인종차별보다 더 무서운 건 상사 갑질인가 보다.
<불평등의 세대>를 쓴 이철승 교수는 한국 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무지개 리더십'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양한 세대와 성별의 리더들로 구성된 ‘무지개 리더십'으로 더 젊은, 더 새로운 아이디어와 에너지를 조직과 사회에 불어넣어야 한다고. 젊은이들과 여성을 조직의 최상층으로 끌어올리면, 경직된 권위주의 문화와 386세대의 장기 집권으로 인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단다.
2020년 새해에는 50대도 ‘워라밸’을 챙겼으면 좋겠다. 야근이나 회식을 권하는 행동은 이제 삼가자. 젊은 사람들이 결혼, 출산, 육아를 꺼리는 바람에 출생률이 낮다고 걱정을 많이 하는데, 출생률 걱정하지 말고, 있는 사람 나라 밖으로 쫓아내지나 말자. 386세대가 2020년 새해 결심으로 취미 생활이나 어학 공부에 매진하면 좋겠다. 오랫동안 누려온 리더십은 이제 젊은 세대와 조금 나눠도 좋을 것 같다. 50대가 잘 놀아야, 나라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