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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지역에서] 미술관, 사라진 제주 풍경을 품다 / 이나연

등록 2020-01-27 18:08수정 2020-01-28 02:37

이나연 ㅣ 제주 출판사 ‘켈파트프레스’ 대표·미술평론가

제주에선 지난달 김택화미술관이 개관했다. 김택화는 1940년 제주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졸업 후 다시 제주로 돌아왔다. 추상표현주의 그룹인 오리진의 창립멤버였을 정도로 추상에 천착하던 작가였다.

미술대학의 데생 수업에서 늘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고 기록되던 그가 고향인 제주의 풍경을 그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60년대 말부터 80년대 중후반은 제주의 풍경을 캔버스에 잘 담아보고자 끊임없이 연습한 시기다. ‘표준형 프레임’에 제주의 풍경이 담겨 있다. 90년대 이후부터 2000년에 이르기까지 제주 풍경은 급변한다. 해안도로가 개설되고 아파트나 테마파크 등이 생기면서 김택화 화백이 그리던 제주 풍경은 거의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제주 풍경의 원형을 기록하기 위해 김 화백은 스케치북을 가로로 길게 잘라 사용했다. 풍경을 직접 보고 그리는 야외스케치를 즐기며 남긴 스케치가 1000점이 넘는다. 유화 역시 가로로 길쭉한 파노라마 타입의 캔버스에 주로 그렸다.

2003년 암 진단 이후 2006년 사망하기까지 작가는 프레임의 변화는 물론 작업도 일변한다. 더 이상 보고 그릴 풍경이 없기도 했거니와 병약해진 체력 탓도 있었다. 풍경을 직접 보고 그리는 대신 기억과 상상에 의존해 제주 풍경을 그렸다. 화백의 상상 속 풍경은 정사각형 프레임 안에 들어 있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구도다. 눈 내린 초가지붕들 사이 올레길을 할머니가 지나는 풍경은 정겹다. 정사각형 틀 안에 탄탄히 자리 잡은 색채들이 만들어낸 형상들은 이처럼 작품 한점 한점을 완벽하게 보이게 한다. 죽기 직전까지 병상에서도 스케치를 멈추지 않던 그가 죽기 직전 남긴 7점의 스케치도 흥미롭다. 화백의 20대 시절 작품 성향처럼 추상으로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작가의 작업실도 미술관에 재현돼 있다. 조각을 전공한 아들이 폐목을 모아 직접 만든 의자들로 꾸민 카페도 있다. 패션디자인을 전공한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작품으로 아트상품을 만들었다. 제주 풍경을 평생 그린 화가였지만, 제주도에서 관심을 두고 지원해준 바는 없었다. 도립으로 운영되며 작가의 이름이 붙은 미술관은 김창열과 이중섭이 있다. 두 작가 모두 6·25 때 일년여간 피난을 왔던 인연으로 제주와 접점을 찾았다. 이중섭미술관은 그가 살았던 집을 거점으로 미술관과 이중섭거리 조성을 하면서 매년 전국 국공립 미술관 중에서도 방문객이 많기로 손에 꼽히는 곳이 되었다. 성공한 미술관이지만 이중섭의 작품을 실제 많이 볼 수 있는 미술관까진 못 되어서 방문객들에겐 면목이 없다. 미술관의 기본은 관람객에게 제대로 된 작품을 선보이는 일이다. 운영비용의 고저를 떠나 한 작가의 예술세계를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정교하게 기획하고 매끄럽게 관리 운영해야 한다. 국공립 미술관들에 반발하듯, 정직하게 작품들을, 한 작가와 지역을 제대로 보여주는 민간 미술관의 개관이 그래서 반갑다.

작품에 대해서 말하자면 어느새 작가에 관해 얘기하게 된다. 작가의 일대기와 작품을 떼어놓고 봐달라는 작가 개인의 요청이 있어도 그렇다. 철저히 은둔하는 작가조차 그 비밀스러움이 작가의 개성이 되고 만다. 작가가 시간을 보내며 작품을 만들어내는 공간인 작업실도, 작업실에서 나온 작품이 놓이는 미술관도 작품만큼이나 매력적인 공간이 된다. 청소를 한 번도 안 했다는 베이컨의 작업실은 그 작업실 자체가 작품 같아 보인다. 자코메티나 발튀스처럼 작업실에서 모델을 두고 작업을 한 작가들의 경우 작업실의 온도가 궁금해진다. 세잔이나 모네, 고흐처럼 야외스케치를 한 작가들의 작품을 좇다 보면 화가의 이젤이 있던 자리에서 실제 풍경을 보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 작업실과 미술관이 있는 지역, 작가가 오가며 산책하고 작업의 영감을 얻었을 동네에 관심이 가는 것도 필연적이다. 모네의 생가가 있던 지베르니, 고흐가 사랑했던 아를, 앤디 워홀의 도시 뉴욕처럼, 작가와 그 작가가 활동한 지역이 떠오르는 일이 자연스럽다. <모나리자>가 걸린 루브르박물관에 가보는 것도, <천지창조>를 보러 바티칸박물관에 가는 일도 흔하다. 김택화의 제주 풍경을 보러 제주에 오는 건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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