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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금강산 시설 철거’ 손해배상 청구안, 그 너머 / 김광길

등록 2020-01-29 18:30수정 2020-01-30 10:08

김광길 ㅣ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

북한은 지난해 12월 말에 올해 2월까지 금강산의 남한 시설을 모두 철거하라면서 그러지 않으면 임의로 자신들이 철거하겠다는 통지문을 발송했다고 한다. 지난해 10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금강산을 둘러보면서 남한에서 건설한 시설의 철거를 지시한 이후의 조처다. 북한이 그해 신년사에서 아무런 대가나 조건 없이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겠다고 선언했는데도 아무런 진전이 없는 것에 대한 반발이다. 미국과의 관계에서 독자성을 확보하지 못한 채 대북제재에 얽매여 남북관계를 진전시키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다. 미국과 우리의 국익이 100% 일치할 수 없으므로 미국과 별도로 남북관계에서 남한만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남북관계의 진전이 북-미 관계의 발전으로 선순환되는 흐름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하여 일방적으로 북한이 남한의 시설을 철거하는 것이 합리화될 수 없다. 남북 간 협의 없이 임의로 남한의 시설을 철거하는 것은 남북이 합의한 ‘남북 사이의 투자보장에 관한 합의서’ 4조1항의 재산의 수용금지 조항에 위반된다. 북한이 임의로 철거하는 경우 남한 건물의 소유권자는 북한에 수용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거나 손해배상을 청구할 가능성이 높다. 이를 위해 금강산 관광 사업의 사업자인 현대아산과 북한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가 체결한 합의서에 명시된 바에 따라 중국의 국제경제무역중재위원회 등에 중재신청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법원에 북한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방안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중재판정이나 판결이 쉽지는 않을 것이다. 중재판정이나 판결이 있더라도 북한 법원에서 북한의 재산에 대한 집행에 협조할 리 만무하므로 실제 북한 내 재산에 대한 집행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북한 내 재산이 아니라 북한 외부에 있는 재산은 사정이 다르다. 금강산 시설의 일방적 철거와 관련된 북한 정부 등의 재산이 외국에 있는 경우 그 재산에 대한 강제집행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북한 정부가 외국과의 거래에서 받아야 할 금액이 있는 경우 그 금액에 대한 압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러한 복잡한 법적 절차를 떠나 북한의 일방적 금강산 시설 철거는 북한에 투자하고자 하는 투자자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이다. 북한은 지난 연말에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5차 전원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 북한은 “정면돌파전에서 기본전선은 경제전선”이라고 하면서 경제 발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당장이 아니더라도 외국의 투자를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외국 투자자의 신뢰 확보가 중요하다. 물론 북한은 이 회의에서 “우리에게 있어서 경제건설에 유리한 대외적 환경이 절실히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화려한 변신을 바라며 지금껏 목숨처럼 지켜온 존엄을 팔 수는 없습니다”라며 무작정 외국을 추종하지 않겠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러나 나라의 존엄을 지킨다는 것이 독불장군일 수는 없다. 보편타당한 국제규범과 투자자에 대한 약속을 저버릴 수는 없다. 존엄을 지키는 것은 국제적 규범을 준수하면서 품위 있게 다른 나라의 존경을 받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지난 연말에 북한이 남한에 한 “바보 신세”니 “주제넘은 일”이니 하는 막말에 가까운 비난은 북한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이런 말은 북한의 절박감과 남한에 대한 실망감이 표현된 것이라 백번 양보해 이해하고 싶다. 그러나 어느 나라의 외교에서 이와 같은 막말이 통용되는가? 남한에 실망감을 표현하고 싶으면 “남한은 미국과의 관계에서 독립적인 주권국가로 역할을 수행하기 바란다”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국제적 규범과 당사자 간의 합의에 어긋나는 재산의 일방적 수용이나 막말로 하는 대남 비난은 북한의 불량국가 이미지를 양산하고 북한에 대한 외부 강경파들의 입지만을 강화할 뿐이다. ‘제국주의 침략’에 반대하는 투쟁은 군사력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북한이 보편타당한 국제적 규범과 합의를 준수한다면 북한이 우려하는 강대국의 군사력에 의한 자주권 침탈의 위험을 낮출 수 있다고 믿는다. 국제적 규범을 준수하는 국가라는 국제사회의 인식을 확산시키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금강산 시설 철거와 같은 남북 간의 문제는 남북 간 협의를 통한 해결이 바람직하다. 협의를 진행하면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중재안을 마련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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