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희 ㅣ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고백건대, 나는 분열과 갈등을 그 반대보다 선호한다. 한국 사회의 경우 그 반대가 평화로운 공존이 되기보다는 대안 없는 완벽한 종속이거나 찍혀서 피곤하게 살기 싫다는 현실적인 타협과 다르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조국 사태의 가장 흥미로운 드라마는 진보의 분열과 분화이다. 이에 586 기성세대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청년세대의 갈등이 교차한다. 모든 사회는 젊은 세대가 앞선 세대를 비판하는 과정을 통해, 낮은 지위의 집단이 특권적 집단에 저항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해왔다. 이런 맥락에서 반대 진영과 똑같은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부 진부한 비판을 제외한다면 진보의 분열은 아주 정상적이고 나아가 바람직하기도 하다.
‘조국 사태’가 의도치 않게 검찰개혁의 가보지 못한 길을 열어주면서, 교육개혁도 한번 꿈꾸어보고 싶었다. 뭐 어떠랴. 꿈꾸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꿈을 실현시키는 데 든다는 게 문제이지. 청년이 분노한 ‘조국 사태’의 본질은 교육을 통한 계급의 공고화이다. 입시에서의 일탈 혐의를 터미네이터로 환생한 자베르 경감처럼 집요하게 파헤쳐 보았자, 또 정시 확대 등을 통해 입시의 엄정한 관리를 아무리 외쳐 보았자 현실의 변화는 미미하다. 이런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여기서 멈춰 서면 강화된 공정함의 외피 아래 학력과 학벌에 따른 불평등만 더더욱 정당화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왜 등급 지어지고 선발당하기 위해 천문학적인 사교육비를 낭비하는 한편, 대학 진입 이후의 교육의 질을 높이기 위한 투자에는 이토록 무관심하고 인색한가. 우리의 고등교육 투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 평균의 3분의 2 정도인데, 이 중 민간이 아닌 정부 재원이 차지하는 비중은 3분의 1로, 정부 투자 비중이 3분의 2 이상인 평균적 선진국의 실제 사용 재원의 9분의 2에 불과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사교육비가 엄청나게 투입되는 고등학교까지의 정부 투자는 오이시디 가입국 평균보다 약간 높다고 한다.
등록금은 비싸지만 가난해진 대학은 학술지 구입을 중단시키고 실험실습비도 줄인다. 결국 또 학교가 제공하는 자원에 더 의존적인, 형편 어려운 학생이 더 큰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물론 다수 국민이 대학을 많이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사립대에 대한 재정지원 확대에도 반대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실상은 급증하는 교육 수요를 충족시킨다는 명목으로 무분별한 사학 설립을 통해 민간 자원에 지나치게 의존해온 정부의 관행이 부실 사학 창궐의 진짜 원인이다.
분화된 진보가 조국 전 장관이 몸담았던 현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해야 할 것은 모든 정책에 평등의 에토스(기풍)를 확산시키라는 것이다. 고등교육에 대한 과감한 투자로 적어도 돈이 없어 대학을 꿈꾸지 못하는 사람을 없애고 원하는 모두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해야 한다. 대학의 성과는 우수한 학생을 얼마나 많이 유치하는가가 아니라 다양한 배경의 학생을 얼마나 우수한 인재로 길러내느냐로 평가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교육개혁을 막는 불평등한 노동시장을 시정해야 한다. 현재와 같은 심각한 수준의 임금격차가 있는 한, 대학이 평준화되는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자신의 자녀를 다른 자녀와 구별짓기 할 수 있는 다른 무언가를 찾아내어 사교육비를 아낌없이 지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무모하고 소모적인 경쟁은 학력과 학벌로 인한 차별과 격차가 합리적인 수준으로 조정되기 전까지 입시 제도를 어떻게 바꾸어도 결코 멈춰지지 않을 것이다.
불평등과 불평등하게 분배된 자원에 기대어 펼쳐지는 무한 경쟁이 평등보다 효율적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불평등은 인간 재능과 자원의 극심한 낭비를 초래한다. 한 저명한 진화생물학자의 다음과 같은 표현처럼. “내가 더 관심 있는 건 아인슈타인 두뇌의 무게나 주름이 아니라, 그와 똑같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면화 농장과 노동자를 형편없이 처우하는 공장에서 일하다가 죽었다는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