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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병사와 바이러스 / 유강문

등록 2020-02-18 18:34수정 2020-02-19 09:31

유강문 ㅣ 통일외교팀 선임기자

“철원 전방부대에서 국방의 의무를 다하고 있는 아들에게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겨 이렇게 글을 씁니다.”

지난해 3월8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한 아버지의 글이 올랐다. “앞으로 군대를 가야 할 수많은 아들들이 더 건강하고 안전한 환경에서 복무할 수 있도록 청원한다”는 이 아버지의 글에는 ‘군 장병을 죽음으로 내모는 아데노바이러스 대책이 필요합니다’라는 제목이 붙었다. 아버지의 바람은 간절했으나 이 청원은 겨우 8명이 동의하는 데 그쳤다.

아들은 휴가를 나왔다가 아데노바이러스에 감염됐다. 급성 폐렴 증상을 보여 병원 응급실에 들어가자마자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허벅지 정맥에서 피를 뽑아 산소를 공급한 뒤 다시 몸속으로 넣어주는 외부호흡장치를 달고 14일 동안 사투를 벌이고서야 겨우 회생했다. 아들의 병상을 지키면서 아버지는 아데노바이러스가 군대에서 자주 출몰하고,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해마다 두세명의 병사가 숨진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만약 아들이 부대에 있다가 발병했다면 굉장히 슬픈 일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고 썼다.

아데노바이러스는 리노바이러스, 코로나바이러스와 함께 감기 증상을 일으키는 3대 바이러스 가운데 하나다. 중국 우한에서 발생해 세계 곳곳을 할퀴고 있는 ‘코로나19’는 바로 코로나바이러스의 변종이다. 발병 초기 증상은 감기와 비슷하지만 고열에 심한 기침이 계속되면서 폐렴으로 발전한다. 이런 중증 감염은 주로 군대나 신병훈련소에서 발견된다. 2016년 고려대 의대에서 나온 ‘신병훈련소에서 발생한 아데노바이러스 연구’를 보면, 군대에서 발생하는 폐렴의 대부분(79.3%)이 아데노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다.

아데노바이러스가 병사들에게 끼치는 위험성은 2017년 12월6일 ‘매년 폐렴으로 사망하는 장병들에 대한 대책이 필요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전직 군의관이 올린 국민청원에서도 제기됐다. 이 예방의학 전문의는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5명의 장병이 아데노바이러스 폐렴으로 숨진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해마다 수십명의 장병이 외부호흡장치로 겨우 목숨을 건지고, 수백명의 장병이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는” 현실을 목격했다. 그는 “이러한 현상은 다른 선진국 군대에서는 없는 일”이라고 한탄했다.

미군은 1950~60년대 아데노바이러스가 병력을 유지하는 데 엄청난 장애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시 10명의 신병이 있으면, 2명은 병원에 들어가고 6명은 훈련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아데노바이러스가 8명의 병력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당황한 미군은 아데노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해 모든 장병에게 투여하기 시작했다. 이후 감염자가 줄어들자 1999년 접종을 중단했으나 다시 감염자가 늘어나자 2011년 말부터 접종을 재개했다.

미군이나 한국군이나 똑같은 병사다. 국가가 필요에 의해 가족의 품에서 빌려온 소중한 사람들이다. 한국군이 징집으로 병력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국가가 짊어져야 할 책무는 모병제로 굴러가는 미군보다 크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지금은 이른바 인구절벽으로 인해 병사 하나하나가 소중한 시대다. 정부는 군 상비병력을 지금의 60만명에서 2022년까지 50만명으로 감축할 계획이다. 현역 자원도 올해 32만명에서 2022년엔 25만명으로 줄어든다.

병사들에게 아데노바이러스 백신을 투여하려면 돈이 든다. 미군의 경우 1명당 20만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려면 당장은 더 많은 돈이 들어갈 것이다. 한국군에게 맞는 백신을 개발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적어도 연간 500억~600억원 정도가 들 것으로 추산한다.

아데노바이러스에 대한 경고가 아버지의 바람과 전직 군의관의 호소를 넘지 못한 것은 그것으로 숨진 병사가 소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생명이었고, 누군가의 소중한 자식이었다. 국방부는 올해 업무보고에서 사상 처음으로 국방예산 50조원 시대를 열었다고 자랑했다. 그러면서 사람 중심의 건강하고 안전한 병영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mo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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