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김현영 ㅣ 여성학 연구자
“정부는 노동과 젠더 문제에 대해 매우 신자유주의적인 방식으로 대처했다.” 이런 문장을 페이스북에 쓴 적이 있는데 의외의 반응을 들었다. 비판이 아니라 칭찬인 줄 알았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라는 말은 그 자체로 대상을 비판하는 용어로 인식조차 되지 않고 있다. 단순하고 직관적으로 말해보자면 새로움과 자유라는 두가지 말이 여전히 매우 강력하게 긍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새로움과 자유에 대해 완전히 다른 생각으로 진입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은 이미 도전받고 있다. “더는 쇼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6년 전 시상식에서 입은 옷을 다시 입고 나온 제인 폰다처럼 새것을 사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소비하지 않기’에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붙이는 운동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2011년부터 세계 65개 나라에서는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Buy Nothing Day)이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런 운동들은 대안이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전범기업, 여성혐오기업, 갑질기업, 아동착취기업 등에 대한 불매운동은 착한 소비, 윤리적 소비를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사지 않기’ 운동의 대안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소비하지 않음’ 자체가 대안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 건 여기에 체제의 불안요소가 있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체제가 지배질서가 된 2000년대 이후 언제나 경제 위기는 경기가 안 좋다는 말로 표현되었고 소비심리 위축은 늘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개인의 ‘심리’로 돌리다니, 정말이지 신자유주의적이지 않나.
그렇다면 자유는 어떤가. 포스트 인터넷 시대의 재현과 대의제의 위기에 대한 놀라운 글을 써온 히토 슈타이얼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 자유는 적극적인 자유, 즉 무언가를 할 자유가 아니라 무언가를 하지 않을 자유―소극적인 자유―로 전환되기 시작했다고 본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무언가를 할 자유보다 하지 않을 자유가 훨씬 더 무제한적이고 따라서 파괴적이라는 점이다. 무엇인가를 할 자유는 특정 대상과 주제에 대한 자유라는 점에서 제한이 있다.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누가 무엇을 왜 표현할 것인가가 공론장의 토론 주제가 된다. 그런데 표현하지 않을 자유에는 아무런 제한도 의미도 없다. 차별과 혐오가 공론장을 지배하고 있을 때 그에 대해 말하지 않을 자유처럼 말이다. 이런 소극적인 자유가 하는 일은 사회적 책임과 의무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는 일이다. 현재의 정치적·경제적 위기 속에서 자유는 규제로부터 벗어날 기업의 자유처럼 타인의 이해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의 이해를 추구할 자유가 되었다. 사회적 유대를 비롯하여 모든 공공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날 자유가 우리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공유하는 자유이며 이는 현존하는 보편적 자유의 유일한 형식이 되었다고 진단하는 히토 슈타이얼의 글은 동의하기 싫지만 무서운 진실의 한 면을 보여준다.
권력자들이 법률전문가들과 정치인들의 비호를 받으며 각종 범죄를 저지르고도 무사한 모습은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들이 누리는 자유는 무엇인가를 할 자유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하지 않고도 무사할 자유다.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될 자유, 사회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자유 말이다. 신자유주의는 급기야 이런 ‘범죄’들을 자유라는 이름으로 옹호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노동하는 이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기업의 자유를 위한 규제 철폐라는 이름으로 옹호하고, 제도와 절차를 통해 해결해야 하는 일을 재능기부와 선한 영향력이라는 개인의 선의를 진작시켜 정치적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는 식 말이다. 이번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영세 자영업자를 위해 내놓은 정부 대책 중 하나는 임대료 지원이다. 건물주가 임대료를 깎아주면 절반은 정부가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선한 건물주 운동’이라는 이름도 붙여졌다. 하지만 이런 방식은 우리가 함께 동등하게 공존한다는 감각을 만드는 데에는 더욱더 실패할 것이다. 사회적 유대를 확인하고 책임을 나눠 가지는 경험을 할 수 있는 사람과 늘 사회에 부담이 되는 존재로서만 살아가는 사람 사이의 거리만 더 넓어질 테니 말이다. 윤리적 소비자와 선한 건물주 사이에 있는 존재들도 윤리적으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어떤 방식으로든 기본소득 논의가 본격화되어야 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