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기 ㅣ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 연구원
인문사회계열 박사과정 진학은 얼마나 무모하고 용감한 선택인가. 연간 등록금이 천만원 수준이고, 주거비와 최소생활비를 포함하면 답이 안 나온다. 대출 조금, 학업과 매우 무관한 아르바이트 조금, 단기 연구사업에 행정보조 등으로 참여해 버는 돈 조금 등을 합쳐서 어떻게든 생활할 수는 있겠지만, 문제는 남는다. 모든 시간을 연구와 학업에 투자할 수 있는 학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 사이에는 결과적으로 여러 격차가 생길 수밖에 없다. 역시 대학원에 가기 위해 가장 필요한 조건은 ‘부모 찬스’를 쓸 수 있는 든든한 가정배경 아닐까. 역량과 의지만 있다면 누구에게라도 기회를 주는 제도적 장치가 이 동네에는 전혀 없다. 부유한 사람만 연구자가 될 수 있다면 계층적으로 편향된 지식이 생산되는 부작용이 심각할 텐데 말이다.
한국연구재단에서 시행해온 글로벌박사양성사업은 국내 인문사회계열 박사과정생에게 주어진 거의 유일한 펀딩 기회였다. 등록금과 생활비를 포괄적으로 지원해주는 사업이었다. 일정한 심사과정을 거쳐 선발된 인원에게 연간 2천만원에서 최대 3천만원에 이르는 연구비가 3년간 지급된다. 이 사업에는 중요한 한계가 있었다. 수혜의 범위가 너무 적다는 것이었는데, 한 해 선발하는 인원이 200명 남짓으로 인문사회계열 선발 인원은 이 중 20% 정도에 불과했다. 그마저도 올해부터는 신규 모집을 중단한다. 대신 올해부터 새롭게 시행되는 인문사회학술연구교수 사업이 가능한 대안으로 안내되고 있다. 이 중 비(B) 유형은 기존의 시간강사지원사업을 확대 개편한 것으로, 연간 약 3천명을 선정하여 1400만원의 연구비를 지원할 계획이다. 박사학위가 없는 박사과정생 및 석사학위 소지자, 대학 내 강사 직위가 없는 연구자도 최근 5년 내 연구업적이 있기만 하면 지원자격이 있으므로 대학원생들을 위한 제도로 볼 수도 있다고들 한다.
4년 전 운 좋게 이전의 사업에 참여했던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이러한 제도 개편에 대해 아쉬움이 크다. 연구와 학업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새로운 사업을 통해서는 보장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간략히 정리하면 올해부터 사라지는 글로벌박사양성사업은 적어도 선정된 대학원생들에게 3년 계약직 정도의 안정성을 허락해주었다. 내 경우 부채를 만들지 않고 무사히 박사과정 학업을 지속할 수 있었으며, 당장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나의 학업과 관계가 적은 잡일로부터 잠시 해방될 수 있었다. 이는 연구자로서 잠재력을 계발할 수 있는 최소조건이었다.
새로운 사업은 대학원생 전원을 불안정한 프리랜서로 만든다. 선정이 된다 하더라도 등록금을 내고 나면 남는 연구비가 월 30만~40만원 수준에 그친다. 그런데도 이 지원이라도 받으려면 이 사업에 탈락하지 않기 위한 노력을 삶의 우선순위에 두어야 한다. 매년 1년 단위로 사업에 새로 선정되어야 연속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각종 사업에 선정되거나 떨어지는 일을 반복하는 프로젝트형 인간은 이미 학계를 비롯해 문화예술, 스타트업, 시민사회 등지에 널려 있다. 개인 삶의 불안정성을 강화하는 모든 제도가 비판받아야 함은 물론이지만, (부모 찬스가 없는) 대학원생들에게는 다른 안정적인 소득원이 전혀 없다. 무엇보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학원생은 개인사업자가 아니라 학생이다.
연구자가 아닌 시민들이야, 대학원에 간 건 가난해질 것까지를 감수할 너의 선택인데 징징대지 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적어도 학술·연구 활동에 대한 이해가 있는 연구자들이 관련 정책 설계에 관여하고 있는데도, 앞세대 연구자들이 누렸던 학생으로서의 기회와 미래 전망과는 거리가 먼 제도 설계가 뒷세대에게 주어지는지는 의문이다. 제도는 자꾸 신호를 보낸다. 돈이 없으면 연구에 대한 꿈은 애초에 갖지 않아야 한다고, 원생은 등록금만 내고 잡일만 해주면 되는 사람이라고. 국내 대학원생이 학문공동체에 필요한 사람일 것이란 생각은 헛된 착각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