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예지 ㅣ 법조팀 기자
며칠 전 한 독자한테 어떤 질문을 받았다. 삼성 계열사 출신인 그는 삼성 쪽에서 ‘사과’할 일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삼성이 직원 연말정산 정보를 뒤져 환경운동연합이나 민족문제연구소 등 진보단체 후원 직원 명단을 만들었다는 지난해 말
<한겨레> 보도(12월26일치 1면: 삼성, 직원 연말정산 정보 뒤져 ‘진보단체 후원’ 수백명 색출)와 관련한 것이었다. 삼성은 그에게 이메일을 보내 회사가 그의 정보를 무단 열람했고, 이를 사과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기자에게 질문한 내용은 조금 특이했다. 그는 실제 삼성이 사과문을 발표할지, 당사자에게 사과할 의도가 있는 것이 맞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사과가 아닌 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든다는 것이었다. 오래 몸담았던 회사로부터 내밀한 개인정보를 침해당한 그가 사과를 받기 전에 ‘의심’부터 하는 모습은 당연하면서도 씁쓸해 보였다.
실제 삼성은 지난달 28일 “임직원의 시민단체 후원내역 파악은 잘못”이라는 취지의 공식 사과문을 냈다. 피해 임직원들에게도 “(후원 내역은) 당시 미래전략실이 임의 작성한 것으로, 회사는 해당 자료를 어떠한 목적으로도 활용한 바 없고 이후로 임직원들의 후원금 내역을 열람하지 않았다”며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는 메일을 보냈다. 그러나 ‘불온단체’로 낙인찍힌 시민단체들은 “이재용 부회장의 국정농단 파기환송심에 영향을 주기 위한 ‘꼼수 사과’에 불과하다. 진정성 없는 사과 뒤에 숨지 말고 진상규명 등 요구에 응답하라”는 입장을 냈다. 사과 메일을 받은 직원이 품었던 의심과 피해 시민단체의 불신은 그 생김새가 닮았다.
이들의 의심에는 합리적 근거가 있다. 삼성에 사과를 권고한 곳이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준법감시위)인 탓이다. 이재용 부회장의 파기환송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1부(재판장 정준영)는 삼성의 ‘준법경영’을 위한다며 준법감시위원회 설치를 주문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내 준법감시위를 이 부회장의 형량을 깎는 데 반영할 수 있다는 ‘진짜 목적’을 드러내 논란이 일었다. 삼성 내부에서는 이번 사과와 <한겨레> 보도를 함께 게시해 준법감시위의 첫 ‘성과’로 선전하고 있다고 한다. 준법감시위가 이렇게 삼성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과 뜻을 갖춘 조직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삼성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은 삼성의 사과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에 대한 물음에서도 비롯된다. 앞서 삼성은 노조와해 사건으로도 네 줄짜리 ‘입장문’을 냈다. 지난해 12월 삼성에버랜드와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와해 사건 1심 선고로 임직원들이 줄줄이 유죄를 선고받은 직후 “많은 분들께 걱정과 실망을 끼쳐 대단히 죄송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그러나 사과 대상이나 책임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사과의 진정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에버랜드 사건 피해자였던 조장희 금속노조 에버랜드 삼성지회 부지회장은 “사과를 하려면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가야 하는데 입장문에 관련 언급이 한마디도 없다. 아직도 노조 하는 사람들은 공격해도 된다는 의식을 버리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삼성 임직원들은 9일 시작된 삼성전자서비스 노조와해 사건 2심에서도 “개별 잘잘못을 떠나 국내 최고의 대기업에 근무하는 임직원으로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사실에 책임을 통감한다”고 했다.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질지에 대한 설명은 빠졌다.
최근 준법감시위는 노조문제를 중점과제로 선정해 권고안을 회사에 보내기로 했다. 하지만 삼성 쪽은 최근 노조와해 사건 재판에서 “삼성그룹이나 전자가 부당노동행위를 주도한 것이 아니라 근로자 사망사고, 파업 등에 대응하며 부득이하게 협력사 문제에 관여한 것”이라며 1심 때와 다르지 않은 무죄 주장을 폈다. 준법감시위의 권고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할지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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