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틸컷.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소녀는 혼자서 가만히 바다 쪽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서 있는 것을 알고 우러러보는 그의 눈동자를 느끼자, 그에게 시선을 돌리고 조용히 그의 응시에 몸을 내맡겼다.”
성직자가 되려 했으나 예술가로 성장하는 젊은 남성 예술가를 다룬 제임스 조이스의 자전적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 4장 후반부다. 소녀는 주인공 스티븐에게 “속세의 청춘과 미의 천사”이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초반부에 바로 조이스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있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다를 바라보는 엘로이즈와 그를 슬쩍 바라보는 마리안느.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스티븐의 시선을 느끼고 조용히 그의 응시에 몸을 내맡긴 소녀와 달리 엘로이즈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안느를 똑바로 쳐다본다. 이 영화가 응시의 권력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엘로이즈를 연기한 아델 에넬은 얼마 전 프랑스 영화제인 세자르 시상식장에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로만 폴란스키의 감독상 수상에 항의하기 위해서다. 18세기 여성 창작자의 위치를 잘 보여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 출연한 배우가 21세기 현실에서도 남성의 권력에 맞서는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로만 폴란스키는 1977년 미국에서 13살 여성을 성폭행한 혐의로 수십년간 해외 도피 중이다. 폴란스키의 영화를 나도 많이 보았다. 보고 싶은 사람은 볼 수 있다. 그러나 성범죄자로 도피 중인 사람에게 꾸준히 권위 있는 상까지 줄 필요가 있을까. 아동 성범죄자 남성의 ‘예술혼’에 왜 이토록 관대할까.
화가와 모델의 관계는 주로 ‘남성’ 화가와 ‘여성’ 모델의 관계로 인식되어왔다. 이때 여성 모델은 이 남성 화가의 성적인 대상과 동일시된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서도 언급되지만 실제로 당시 여성들은 누드, 그중에서도 남성 누드를 그릴 수 없었다. 창작 능력은 곧 성적 능력이기에 남성 화가의 붓으로 그려진 수많은 여성 누드에 찬사를 보내면서도 그 반대는 용납되지 않았다. 이는 미술사에서만이 아니다. 남성 창작자들의 붓이, 그들의 펜이, 그들의 카메라가 창작을 빌미로 수없이 자행한 폭력의 역사가 있다.
익숙한 남성의 응시를 걷어내면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교차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에는 식탁에 앉아 꽃을 보며 자수를 놓는 하녀 소피와 초상화가 마리안느, 이 화가의 모델인 엘로이즈의 눈빛까지 여성의 응시로 가득하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 여성의 위치는 흐릿해진다. 하녀가 자수를 놓는 동안 두 여성이 식사 준비를 하거나, 화가가 모델의 위치에 서고 모델이 화가와 함께 초상화 앞에서 ‘동등하게’ 바라본다.
특히 이 영화에서 하녀 소피가 자수를 놓는 장면을 두 번이나 가까이에서 보여주는 감독 셀린 시아마의 세심함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순수미술과 공예의 위계 설정으로 자수 혹은 바느질은 ‘여자들의 허드렛일’처럼 취급받았다. 지금도 알록달록 다채로운 색과 무늬의 천으로 손바느질을 하거나 재봉틀 앞에 앉아 나와 타인을 위한 마스크를 만드는 이들은 대체로 여성이다. 타인의 몸과 열정을 착취하는 창작이 아니라 돌보고 연결되는 활동으로 만들어내는 창작이 우리에게는 더 절실하다.
다시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으로 돌아간다. 이 아름다운 소설에는 “이 세상에 나와 살고 실수하고 타락하고 승리하고, 삶에서 다시금 삶을 창조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예술가로 나아가는 스티븐의 벅찬 성장이 담겼다. 문제는 ‘실수와 타락’의 무게가 성별에 따라 다른 저울로 측정되어왔다는 점이다. 많은 여성 창작자들은 ‘실수와 타락’에서 훨씬 더 치명타를 입었다. 성범죄자 남성은 실수와 타락을 용서받으며 거장이 될 수 있지만, 거장이 될 수도 있었던 여성들은 수없이 기회를 잃어왔다. 다시 말하면 실수하고 타락할 기회마저 상실하곤 했다. 여성들은 더 많이 실수하고 타락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이를 통해 다시금 삶을 창조할 권리가 있다.
이라영 ㅣ 예술사회학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