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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푸른 유리 한 조각 / 신영전

등록 2020-04-01 18:38수정 2020-04-02 02:37

신영전

한양대 의대 교수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는 푸른 유리 한 조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날 누군가에 의해 바닥에 내팽개쳐졌을 때 우리 몸의 일부가 부서져 생겨난 듯합니다. 그래서인지 그 유리 조각은 멍 색깔처럼 푸릅니다. 내 안에서 그것이 달각거리는 날이면 심장을 찔러 가슴에 피가 흥건히 고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땐 그것을 꺼내 들어 다른 이를 찌르기도 했습니다. 찌를 때는 통쾌했지만 유리 조각을 움켜쥔 손에서도 피가 흘렀습니다.

온 세계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어수선하지만 하늘은 천연덕스럽게 푸르고 볕은 따스한 봄날, 오랜만에 가슴속 그 유리 조각을 꺼내 보드라운 천으로 닦았습니다. 유리 조각도 저처럼 나이를 먹어서인지 여기저기 무디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푸른빛은 여전히 제 가슴을 설레게 하고 군데군데 남아 있는 뾰족하고 날카로운 날은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스치는 것들에 붉은 핏자국을 남기기에 충분했습니다.

오늘 오랜만에 가슴속 이 유리 조각을 꺼내 든 이유는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이제 곧 다가올 총선입니다. 저는 그날 이 유리 조각을 가슴에 품고 투표장에 가려고 합니다. 찍을 사람이 없어도 가려 합니다. 제가 투표장에 안 가면 바로 ‘저들’이 제일 좋아할 테니 마스크 두세개 하고라도 갈 겁니다. 국회의원이 되어서는 안 되는 사람을 안 되게 하려고, 푸른 유리 조각으로 내리찍듯, 그들을 찍지 않으러 가렵니다.

찍을 사람이 없으면 ‘나’를 찍으면 됩니다. 부자는 부자를 찍을 테니 걱정 말고 가난한 사람은 가장 가난한 후보를 찍으면 됩니다. 여성은 여성을, 젊은이는 가장 젊은 이를, 비정규직은 비정규직을 찍으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유권자 중 50.5%가 여성이고 19세부터 39세 유권자가 44.2%에 이르니 국회의원의 거의 반이 여성과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로 채워질 겁니다. 노동자 중 비정규직이 37%이고 연 가구소득이 6천만원이 안 되는 서민이 80%이니 국회의원의 절대다수도 서민과 비슷한 경제수준인 사람들이 되겠지요. 상상해보세요. 이렇게만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민의를 잘 대변할 국회가 되겠지요?

캐나다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토미 더글러스는 ‘생쥐나라’라는 제목의 연설에서, 생쥐들을 못살게 하는 검은 고양이를 몰아내고 다시 그 자리에 흰 고양이를 앉히고 좋아하지 말고 생쥐나라에서는 생쥐를 지도자로 뽑으라고 했지요. 그의 말대로 국민들은 생쥐를 지도자로 뽑아 행복한 나라를 만들었지요. 그러니 ‘그/그녀’ 말고 ‘나’를 찍으세요. “그래도 의리가 있지” “미워도 다시 한번” “비판적 지지” 뭐 이런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이번에는 한 손에 날카로운 유리 조각 꽉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 ‘나’를 쾅 찍으렵니다.

유리 조각을 꺼내 든 두번째 이유는 코로나19 때문입니다. 빅토어 프랑클에 따르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혔을 때 한 동료가 살아남는 묘책을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매일 아침 남은 빵을 포기하더라도 유리 조각으로 면도를 하라는 것이었지요. 그래야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여 가스실로 끌려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가스실로 끌려간다고 해도 그 푸른 유리 조각으로 아침 면도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왜냐고요? 끌려온 15만명 중 7만5천명이 죽은 지옥 같은 수용소 삶 속에서도 빅토어 프랑클은 한가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인간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거지요. 저는 이 자유가 바로 우리 가슴속의 푸른 유리 조각이라 생각하고, 이 고통의 시간, 이 푸른 유리 조각으로 자격 없는 정치인들, 혐오와 배제와 싸우는 자유를 선택하렵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을 고통으로 내몰고 있는 것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아닙니다. 깊은 동굴 속에서 잠자고 있던 바이러스를 깨워 불러낸 것은 우리 인간의 탐욕이고 이 푸른 유리 한 조각 가슴에 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인류의 종말까지 거론되는 위기의 시기에 마지막으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인공호흡기가 아니라 이 푸른 유리 한 조각일지도 모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조심스레 가슴을 열어 안을 들여다봅니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유리 한 조각이 제법 푸른빛으로 반짝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잠든 깊은 바닷속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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