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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읽기] 죽은 스탈린, 살아있는 진영론 / 조형근

등록 2020-04-05 18:18수정 2020-04-06 09:40

조형근 ㅣ 사회학자

1937년 2월의 어느 날, 니콜라이 부하린의 아파트에 세 명의 비밀경찰이 들이닥쳤다. 마침 전화가 울렸다. “어떻게 지내고 있나, 니콜라이?” 스탈린의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와서 저더러 크렘린에서 나가라고 하네요.” 부하린이 대답했다. 스탈린은 착잡했다. 부하린의 전처 나데즈다가 보낸 간절한 편지가 떠올랐다. 이 진실한 혁명가를 반역죄로 기소한다면 자신도 당을 떠나겠다던. “그놈들 악마한테나 보내버리게.” 스탈린은 거칠게 전화를 끊었다. 퇴거는 당분간 유예되었다. 그 자신이 악마라고 해도 좋을 스탈린조차 부하린을 제거할 때는 망설였다. 부하린은 늘 사랑받았다. 스탈린도 그를 좋아했다. 그래도 죽여야 했다.

소련 정치범수용소 출신의 역사가 로만 브랙먼이 쓴 전기 <스탈린의 비밀파일: 숨겨진 인생>이 전하는 부하린 숙청의 한 장면이다. 물론 스탈린은 잠시간의 감상을 거두고 곧 ‘정치’를 재개했다. 부하린은 2월27일 체포됐다. 온갖 반혁명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고, 이듬해에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스탈린의 권력 장악 기예에는 절륜한 바가 있다. 트로츠키가 우선 타깃이었다. 인물이 탁월하니 두려워하고 질투하는 이들이 있었다. 됨됨이가 범속한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손잡고 실각시켰다. 둘을 제거할 때는 명민하고 인기 많은 부하린과 제휴했다. 이제 혼자 남은 부하린 차례였다.

부하린은 인간적 사회주의 노선으로 소련 인민과 서구의 지지를 받았다. 스탈린이 소련 사회주의의 흑화를 상징한다면, 부하린은 살아남은 희망의 증거였다. 1936년, 부하린은 처와 함께 파리를 방문했다. 곳곳에서 강연하고 인터뷰했다. 망명 권유를 받았지만 물리쳤다. 앙드레 말로에게 말했다. “스탈린은 절 죽일 겁니다.” 이윽고 돌아가 예견된 죽음을 맞았다.

스탈린은 그저 권력에 미친 악마일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그는 검소했다. 부패하지도 않았다. 선입견과는 달리 옛 동지들을 마구 죽이지도 않았다. 트로츠키조차 처음에는 추방에 그쳤다. 정적을 죽이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중반부터였다. 왜 그리 잔혹해졌을까? 그에게 정치는 본디 전쟁이었다. 신생 소련은 제국주의 국가들에 포위되어 있었다. 혁명 직후의 내전 개입 이래 제국주의의 위협은 상수였다. 스탈린은 특히 독일의 소련 침공을 확신했다. 1933년 나치의 집권과 재무장 선언으로 확신이 굳어졌다. 전쟁이 임박했으므로 농민의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중공업 건설에 매진해야 했다. 민주주의는 사치였다.

반면 부하린의 노선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래로부터의 소비에트 민주주의, 점진적이고 유연한 경제개혁, 인민의 실생활 향상을 꾀하는 경공업 육성 등등. 스탈린은 가소로웠다. 낫과 괭이, 투표용지 따위로 독일의 전차와 전투기를 막겠다고? 소련은 가난한 농업국이었다. 우방 하나 없이 사방이 적이었다. 그 소련이 독일이 침공해온 1941년에는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공업국이 되어 있었다. 스탈린이 이끈 기적이었다. 나치가 침략하자 정부와 공업시설을 후방으로 옮겨 무기를 생산하게 하고, 자신은 모스크바에 남아 전선을 지켰다. 잔인하되 용감했다.

스탈린은 진영 테제의 창시자였다. 세상은 공존할 수 없는 적대 진영으로 나뉘어 있으며, 정치는 진영 간의 전쟁이라고 믿었다. 이상을 떠벌리는 지식인 부류를 경멸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그의 미친 듯한 중공업 육성이 없었다면 소련은 나치한테 패망했을 확률이 높다. 그렇게 소련은 기적처럼 살아남았다. 진영론을 폄하할 수 없는 까닭이다. 그렇게 기적이 된 소련은 사회주의도 민주주의도 아닌 괴물이 되었다. 인민이 지킬 이유가 없었다. 진영론을 경계해야 할 이유다.

정치란 결국 진영 간의 전쟁이라는 믿음이 여전히 강력하다. 진보 진영도 다르지 않다. 검찰개혁도 전쟁이라 아군 장수의 허물을 물으면 반역이 된다. 수십년 만에 민주적 대표성을 조금 보강한 새 선거제도는 진영론자들의 편법으로 만신창이가 됐다. 처음에는 머뭇대던 위성정당들이 어느덧 당당해졌다. 행동하는 현실주의자들의 시간이 도래했다. 선거에 지면 명분 따위 무슨 소용이냐며 꾸짖는다. 맞다, 정치는 ‘어느 정도’ 전쟁이다. 그래서 묻고 답해야 한다. 피의 대가로 우리가 살게 될 세상은 어떤 곳인지, 어떤 정의를 약속하는지. 거기 제대로 답할 수 없다면, 이건 ‘그냥’ 전쟁이다. 심지어 지저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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