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훈 ㅣ 종교학자
선거가 끝났다. 큰 이변은 없었다. 오히려 모종의 기시감과 안정감마저 느껴지는 결과다. 한 당이 승리했다. 반대편 당은 참패했지만 건재하다. 제3세력들이 존재하지만 존재감은 없다. 그러지 말자고 바꾸어놓은 제도가 이들의 지분을 더 줄였다. 2000년대 이후 1, 2당의 자리만 바뀌어가며 지속되어온 구도는 변하지 않았다. 선거권이 생긴 이후 필자는 언제나 민주당계 정당보다 ‘왼쪽’에 투표해왔다. 정당 소속이나 대단한 진보적 신념이 있어서가 아니다. 나는 부동층의 영어식 표현인 스윙보터에 가까운 유권자다. 단지 그 ‘스윙’의 궤적이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할 때조차 민주당계 정당들까지는 닿지 않을 뿐이다. 이번 선거에서도 가장 오른쪽의 선택지가 정의당이었고, 녹색당, 노동당, 미래당 등을 두고 고민했다. 늘 이런 식이었으니 나에게 선거란 야구로 치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한국시리즈를 바라봐야 하는 하위권 팀들의 팬 같은 느낌이다.
정치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필자에게는 양당제가 더 나은지 다당제가 더 나은지 판단할 능력이 없다. 단지 저 거대 양당에 던지지 않은 내 표가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기분은 피할 수 없다. 그와는 별개로, 양당제란 참으로 인간의 본성을 잘 반영하는 제도다. 많은 인류학자들과 인지과학자들이 지적해온 바와 같이, 마음은 이분법을 선호한다. 우리 생각의 범주는 수많은 이항대립들, 이를테면 여성적인 것과 남성적인 것, 성과 속, 정결과 부정, 선과 악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생기지 않았다. 타자를 좋은 놈들과 나쁜 놈들로 구분하는 것은 편리하지만 실제로는 다양한 스펙트럼의 나쁜 놈들이 있다.
이분법은 현상을 파악하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한다. 종교학 분야에 잘 알려진 농담 하나가 있다. 어느 불교 승려가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대립이 심각한 아일랜드에 방문했다. 머리를 깎고 기묘한 복장을 한 이방인에게 호기심을 가진 젊은이들이 가서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만 가톨릭이신가요, 개신교이신가요?” “아뇨, 저는 불교도입니다.” 잠시 혼란을 겪은 젊은이들은 자기들끼리 웅성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아, 그러시군요. 그렇다면 가톨릭 불교이신가요, 개신교 불교이신가요?” 또, 19세기에 중국을 방문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도교에 “개신교적인 노장사상”과 “가톨릭적인 우상숭배”가 섞여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물론 그런 식의 구분법을 가지고 불교나 도교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음의 이항대립을 이용한 이분법이 가장 고약한 방식으로 이용되는 영역은 역시 정치적인 상징조작이다. 한국에서는 ‘빨갱이’라는 범주가 그랬다. 선량한 국민의 대립항인 빨갱이에는 사회주의자들로부터 국가주의적이지 않은 민족주의자들, 심지어는 민주화 지지자들이나 노조 활동가들까지도 포함될 수 있었다. 이런 기괴한 개념이 그토록 오랫동안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이를 북한이라는 “위험한 타자”와 연결시켰기 때문이었다. 권력에 순종하지 않는 모든 이가 “북한을 추종하는 자들”이고, 나아가 “비국민”이라는 담론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런 종류의 상징조작은 극우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다. 많은 이에게 이번 총선은 “한일전”이었다. 보수 세력은 친일파의 후예인 “토착왜구”고 일본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자들이니 국회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는 빨갱이 담론의 ‘북한’을 ‘일본’으로 대체하는 또 다른 형태의 상징조작이라는 점에서 위험성을 품은 시도이기도 하다. 거대 양당의 ‘비례정당 꼼수’에 분노해 “민주당만(도) 빼고” 투표하자는 이들에게 쏟아진 비난도 그렇다. 이분법의 함정은 두 개의 항이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데 있다. 현 정부는 앞으로도 자신들보다 훨씬 보수적인 파트너와 협상하며 개혁을 제약당할 것이다. 이 굴레에서 벗어나려면 새로운 이항대립이 필요하다. 그 경계는 지금보다는 훨씬 ‘왼쪽’에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