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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겨레 프리즘] 총수 이재용의 세계관 / 김경락

등록 2020-05-12 16:02수정 2020-05-13 02:39

김경락  ㅣ 산업팀장

삼성그룹 총수 3년차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지난 6일
대국민 사과 회견을 했다. 지난 2월 출범한 삼성 준법감시위원회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무노조 경영 포기, 준법 경영 등 예상된 답변 외에 이 부회장은 한마디 더 했다. “제 아이들에게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겠습니다.”

답지에 없던 ‘4세 경영 포기’ 약속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망설여졌다.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고 사라졌다. 경영학 교과서를 들추며 노동권과 달리 경영권은 엄밀한 의미에서 실체가 모호한 권리라고 날을 세워볼까, 경영권 처분은 총수가 아닌 주주의 권한이라고 꼬집을까도 싶었다. 세부 실천 방안이 없다는 점이나 삼성전자의 덩치(시가총액)가 너무 커져버린 바람에 자녀 승계를 원해도 쉽지 않은 삼성 지배구조의 현주소를 담백하게 짚어볼까도 싶었다. 재벌 문제 전문가나 시민단체의 논평과 성명도 이런 문제의식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어느 하나 ‘이것이다’ 싶은 게 없었다. 모두 틀리지 않은 비평이고 적실한 내용이지만 그의 선언을 온전히 평가하는 데는 부족해 보였다. 비평의 2% 정도는 당사자 입장에서 바라본 ‘내재적 평가’에 할애해도 될 듯싶었기 때문이다. 사과도 그러하거니와 비평도 당사자의 공감을 얻지 못하면 그 의미가 퇴색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 부회장의 세계관 속에서 ‘경영권’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4세 경영 포기’가 어느 수준의 결단에 해당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는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두고 있었지만 외부에 밝히는 것은 주저해왔습니다” 라고 호소했지만 와닿지는 않았다. 이는 총수로서의 그의 성장 과정을 아는 가족이나 친구도 아니거니와 그를 가까이서 본 참모도 나는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20여년 전부터 그를 궁지에 몬 승계와 관련한 복잡다단한 이야기와 그 과정에서의 그의 번뇌는 나와 같은 일반인이 애초부터 가늠하기 어려운 주제였다. 물론 삼성 내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네트워크는 있지만 그들 역시 호가호위는 할지언정 이 부회장 마음속을 읽을 정도로 지근거리에 있지는 않았다. <한겨레> 등 일부를 제외한 상당수 언론은 ‘4세 경영 포기 선언’을 높게 평가했지만, 이 부회장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 수 없었다. 외려 그런 공치사는 “삼성의 영향력에서 비롯된 세련된 ‘용’()비어천가가 아닌가”란 삐딱한 생각도 들었다.

사과 회견 이후 개운하지 않은 마음은 이틀 뒤 만난 한 대학교수의 말을 접하고 나서 조금은 풀렸다. 그는 ‘독재자의 딜레마’라는 개념을 꺼냈다. 사전적 정의와는 거리가 있는 설명이었는데, 여하튼 절대 권력을 쥔 사람의 비극은 그의 주변이 비슷한 얘기만 하는 이들로만 채워져 있는 터라 스스로 굴레를 벗어나려 해도 쉽지 않다는 데 있단 얘기였다.

이 말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두가지였다. 우선 비평의 2% 아쉬움을 메우려던 것은 나의 욕심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외부자로서 내재적 평가를 위해 필요한 공개 자료가 너무 부족하거나 신뢰도가 의심스러운 ‘만들어진’ 자료뿐이라는 자각이 들었다. 두번째는 결국 그 딜레마를 깰 주체는 내가 아닌 이 부회장 자신이라는 것이다. 자신을 둘러싼 장막을 거두고 나오는 일은 부단한 노력과 상처를 수반하는 일이겠으나, 밖에 있는 이가 그 장막을 넘어 안을 들여다보는 것보다는 쉽기 때문이다. 어쩌면 6분 남짓 짧은 회견은 장막을 넘어서려는 그의 첫 시도일지도 모른다.

와병 중인 그의 부친이자 삼성 2대 총수인 이건희 회장은 ‘은둔의 제왕’(The Hermit King)이라고 불렸다. 세계적인 정보기술(IT) 기업을 이끌면서도 본인을 드러내고 사회와 소통하길 꺼리는 모습에 착안해 미 시사주간지 <뉴스위크>(2003년 11월)가 붙인 별명이다. ‘뉴 삼성’을 외친 이 부회장은 은둔의 제왕이 아니길 바란다. 그는 사과문에 이렇게 쓰고 읽었다. “먼저 한 걸음 다가서겠습니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가치에 귀를 기울이겠습니다.”

sp9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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