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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장석준, 그래도 진보정치] 훌리오 앙기타를 추모하며

등록 2020-05-28 17:04수정 2020-05-29 02:38

장석준 ㅣ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지난 16일 스페인 좌파의 저명한 지도자 훌리오 앙기타가 지병인 심장 질환으로 사망했다. 1941년생이니 느닷없는 비보는 아니지만, 사망 일주일 전에도 티브이(TV)에 나와 “코로나19 이후에 모두가 좋은 삶을 누리는 사회를 만들 방도를 고민하자”고 촉구한 그였기에 스페인 사회의 슬픔은 각별하다.

사실 앙기타는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앙기타는 스페인 공산당원이었다. 우리에게는 금기시되는 이름을 내건 정당에서 대표 격인 총서기까지 역임했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에게 공산당(PCE)은 프랑코 독재정부에 맞서 싸운 민주화 세력의 한 부분임을 이해해야 한다.

1978년에 우리보다 10여년 일찍 민주화가 시작된 스페인에서는 또 다른 좌파정당 사회노동당(PSOE)이 펠리페 곤살레스 총리를 내세워 14년이나 장기 집권했다. 반면에 공산당은 1982년 총선에서 당선자가 하원 총 350석 중 4석에 그칠 만큼 위축됐다. 이 무렵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른 인물이 앙기타다.

중학교 역사 교사였던 앙기타는 독재 시기에 공산당의 비합법 투쟁에 참여했다. 1979년에 지방선거가 처음 실시되자 그는 안달루시아의 유서 깊은 도시 코르도바 시장에 당선됐고, 4년 뒤에는 무려 58%의 지지를 받으며 재선됐다.

위기에 빠진 당은 앙기타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1988년에 공산당 총서기로 선출됐고, 더불어 공산당이 다른 급진좌파 정파들과 함께 결성한 연합정당인 좌파연합(IU) 대표도 맡았다. 새 대표 아래에서 좌파연합은 집권 사회노동당을 좀 더 왼쪽으로 견인하는 데 만족하던 입장에서 벗어나 전투적 야당을 표방하기 시작했다.

앙기타는 스페인에 세 개의 주요 정당이 있지만 진영은 두 개가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의회의 대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인민당(PP)과 사회노동당은 실은 한 진영이라는 것이었다. 두 당 모두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던 유럽연합에 스페인 경제를 종속시키는 데 앞장서고 있었다. 부동산 거품을 이용해 부정한 정치자금을 모으는 것도 똑같았다. 앙기타가 이끄는 좌파연합은 사실상 한통속인 두 거대 정당에 맞서는 대안으로 성장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앙기타의 노선은 언론의 엄청난 공격을 받았다. 비난에 앞장선 것은 우파 언론이 아니라 ‘좌파’ 언론이었다. 이들은 앙기타 노선이 양비론을 내걸며 실제로는 우파 인민당이 아니라 좌파 사회노동당에 상처를 입힌다고 비난했다. 좌파연합 안에서도 탈당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나 앙기타는 흔들리지 않았다. 사회노동당 중앙정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펼칠 때 코르도바에서 공공부문을 늘리던 뚝심으로 버텼다. 언론의 저주와는 달리, 그가 대표를 맡고 처음 치른 1989년 총선에서 좌파연합은 의석을 17석으로 늘리며(9.1% 득표) 제3당으로 부상했다.

앙기타 자신은 심장 질환 때문에 2000년에 정계를 은퇴해야 했고, 중학교 역사 교사로 돌아갔다. 하지만 사회 변혁 일선에서 은퇴한 것은 아니어서, 미국의 이라크 침략에 반대하는 시위를 이끌었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실업과 긴축 정책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결집하는 대중운동에 나섰다.

이 시기에 스페인에서는 새 좌파정당 포데모스가 탄생했고, 이들은 다시 좌파연합과 함께 ‘우니다스 포데모스’라는 선거연합을 결성해 거대 양당에 도전했다. 결국 40여년간 양대 정당이 독점하던 정치 지형은 무너졌다. 우니다스 포데모스는 현재 사회노동당과 대등한 입장에서 좌파 연립정부를 결성해 코로나19 위기에 맞서고 있다.

앙기타가 고집스럽게 밀고 간 꿈이 우니다스 포데모스를 통해 실현된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는 포데모스는 이러한 전사(前史) 없이는 있을 수 없었다. 고독과 고립, 고난을 이겨내지 않고는 결코 변화를 열 수 없는 법이다. 앙기타는 먼 동쪽의 진보정당 운동에 이 교훈을 전하며 세상을 떠났다.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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