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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지역에서] ‘탕진잼’과 재난 인권 사이에서 / 명인(命人)

등록 2020-06-01 17:51수정 2020-06-02 14:13

명인(命人) ㅣ <회사를 해고하다> 저자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청했다. 나에겐 아직 지급되지도 않은 걸 보면 ‘긴급’이란 말은 영 어울리지 않는다. 그런데다 나는 ‘신용카드·선불카드·상품권’ 중 무엇으로 지급받을지에 대해서도 꽤 오래 고민했다. 사용기한과 사용처의 제한 때문이다. 재난 앞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은 저마다 긴급한 사용처가 다를 텐데 받는 사람이 꼭 써야 하는 곳에 쓸 수 없는 게 무슨 긴급재난지원금일까? 집세도 낼 수 없고, 빚도 갚을 수 없고, 관리비나 전기요금 같은 공과금도 낼 수 없고, 교통비로도 쓸 수 없고…. 시골에 사는 내 경우엔 소비의 절반 이상이 생산자와의 직거래인데 그것도 당연히 불가하다.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최소한의 소비로 생활을 꾸려가는 내 아들도 고민이란다. 우리 식구들은 기한 내에 지원금을 다 쓰려면 불필요한 소비를 늘려야 한다. 정작 꼭 필요한 곳에 쓸 돈은 없는데, 꼭 필요하지도 않은 소비는 부러 찾아서 해야 하는 상황,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가구당’ 지원으로 재난지원금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려온다. 한뎃잠이라도 몸 누일 곳을 잃어버렸으나 재난지원금은 받을 수 없는 노숙인들의 이야기도. 그런 가운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탕진잼’이라는 유행어가 돌기 시작했다. 모처럼 국가로부터 현금성 지원을 받은 사람들이 어디에든 그것을 즐겁게 쓰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유감이 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탕진잼’이라는 말은 ‘재난’이라는 상황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말이 아닌가?

이럴 거면 그냥 ‘단기 경기부양지원금’이라고 하지 왜 ‘긴급재난지원금’이라고 하는지 나는 당최 모르겠다. 이것은 단적으로 인민들이 느닷없이 겪고 있는 재난에 대한 정부의 시각을 드러내준다. 단지 확진자의 숫자로 표시되는 케이(K)-방역의 성과, 역시 숫자로 표시되는 경기종합지표가 중요할 뿐 사실상 인생이 통째로 무너지고 있는 구체적인 사람, 사람들에게는 별 관심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 ‘긴급재난지원금’이라면 같은 재원을 사용하더라도 가장 빠른 결단으로, 자국 내 모든 개인에게, 현금으로, 조건 없이 지급하면 되는 일이었다.

한편 이것은 우리 사회의 인권의식이 어디쯤에 있는지를 돌아보게 되는 표지이기도 하다. 인권의 눈으로 어떤 사안을 본다는 것은 가령, 세월호 참사를 예로 들면 304명이 죽은 한 건의 사고가 아니라 1명이 죽은 304건의 사고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 국면에서 방역에 도움은커녕 오히려 방해가 되는 온갖 혐오가 이 국면에 창궐해온 것은 정부부터 언론까지 기본적으론 이런 시각이 전제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이 사회의 누구라도 위험에 빠지면 나 역시 위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여실히 가르쳐주었다. 신천지든, 동성애자든, 클럽에 간 사람들이든 어떤 집단을 혐오하고 책임을 떠넘긴다고 해서 우리가 안전해질 수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확진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권을 존중하고 보호할 때 누구든 안심하고 정직하게 자신을 드러내어 우리 모두를 보호할 수 있다는 것, 인권이 곧 방역이란 말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넉 달째 이어진 코로나19 국면에서, 조금은 불편할지언정 아직 내 일상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누군가가 이 재난 상황에도 위태롭게 자신을 갈아 넣어 우리의 일상을 떠받치고 있다는 뜻이다. 방역의 최전선에서 싸우고 있는 의료진을 비롯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당장 오늘 우리 집에 배달된 택배만 해도 그렇다. 최근 물류센터에서 속출하기 시작한 코로나19 확진자들이 아니어도 이미 과로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한 택배 노동자가 여럿이다. 택배 노동자뿐 아니라 수많은 돌봄 노동자 등 재난 상황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의 노동이 우리의 일상을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코로나19를 통해 새삼 깨닫게 된다.

누군가의 인권이 침해되는 상황은, 존엄이 무너진 당사자만이 아니라 목격자로서의 내 존엄에 대한 질문이 시작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건강뿐 아니라 우리의 인권 역시 이토록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배워야 할 차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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