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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 경찰인권행동강령의 아쉬움

등록 2020-06-11 17:50수정 2020-06-12 02:38

한채윤 ㅣ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빠졌다. ‘성적 지향’이 또 빠졌다. 자초지종은 이러하다. 6·10 민주항쟁 기념일에 맞춰 경찰청은 ‘경찰관 인권행동강령’(이하 강령)을 발표했다. 지난날의 과오를 씻겠다는 의지라고 한다. 경찰은 인권을 침해하는 행위를 하도록 지시를 받으면 거부해야 하고, 이에 따른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범죄피해자 보호, 가혹행위 금지, 사생활 보호를 비롯해 차별금지까지 강령의 10개 조항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이는 2018년 경찰개혁위원회의 권고에 따른 것으로, 경찰청은 국제적 수준의 경찰 인권 강령 개발을 위해 ‘대한국제법학회’에 의뢰해 강령의 초안을 받았다. 최종적으론 경찰의 주요 정책을 심의하고 의결하는 기구인 ‘경찰위원회’를 거쳐 확정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초안에 있던 ‘성적 지향’이 사라졌다. 경찰청은 모두 다 열거하기엔 너무 길어서 뺐다고 해명했다.

차별사유를 길게 열거하는 방식이 강령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엔 수긍이 간다. 통상 차별금지사유는 국가인권위원회법 2조에 ‘평등권 침해의 차별 행위’로 열거된 19개의 사유와 그 외에도 더 있음을 의미하는 ‘등’까지로 표준화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2003년에 만들어진 ‘인권보호수사준칙’에 이미 차별금지사유로 ‘성적 지향’이 포함되어 있고, 2019년에 ‘법무부령’으로 상향 조정된 ‘인권보호수사규칙’의 제4조에도 그대로 명시되어 있다. 강령에 열거되지 않았다 해도 경찰이 ‘성적 지향’으로 차별하겠다는 뜻은 아님이 명확하다.

‘강령 해설서’엔 성적 지향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니 경찰의 진심을 믿는다. 하지만 경찰위원회가 열거 항목을 줄이면서 무엇을 남길 것인가를 결정하는 건 더 신중해야 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중요하고 긴급한 차별사유들은 먼저 열거하고, 이미 익숙하거나 드물게라도 생기는 차별사유를 ‘기타 등등’으로 묶었다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혹은 아예 포괄적으로 다루어 해석의 여지를 넓히는 것도 좋다. 그러나, 너무 길어서 줄였다는 제6조는 “…합리적인 이유 없이 성별, 종교, 장애, 병력, 나이, 사회적 신분, 국적, 민족, 인종, 정치적 견해 등을 이유로 누구도 차별하여서는 아니 되고…”로 남았다. 여기에 ‘성적 지향’ 네 글자를 추가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을까?

역대 경찰청장 중에서 가장 인권 의식이 높다고 평가받는 민갑룡 경찰청장은 33년 전에 경찰의 최루탄에 의해 사망한 이한열 열사의 추모식에 참여했다. 경찰을 대표해서 사과를 한 뒤 강령을 발표했다. 이런 행보는 미국에서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의 폭력에 사망하는 사건이 생긴 직후라 더욱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래서 ‘성적 지향’이 빠진 것이 더욱 아쉽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에 항의하는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라는 구호를 굳이 ‘모든 목숨은 소중하다’로 바꾸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희석시킨다는 비판을 상기해보자.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은 바로, 그 ‘모든 목숨’에 흑인의 목숨은 배제한 오랜 편견과 차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미래통합당 초선 의원들도 국회에서 ‘모든 차별에 반대한다’는 피켓을 들고 8분46초간 인종차별에 대해 항의하는 ‘한쪽 무릎 꿇기’ 퍼포먼스를 했다. 하지만 미래통합당은 2007년부터 지금까지 차별금지법의 제정을 막았고, 국가인권위원회법에서도 ‘성적 지향’을 삭제하려 애쓴 당이 아닌가. 이런 과오부터 반성하지 않고 ‘모든 차별 반대’를 운운하면 결국 그 ‘모든 차별’에조차 성적 소수자를 향한 차별은 포함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된다.

혹여 경찰이 성적 지향을 넣었다가 반동성애 혐오 세력들에 시달릴까 봐,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삭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기우이길 바란다. 마침 강령의 제10조는 인권교육 실시다.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대한 이해와 성적 소수자 혐오를 없애는 교육을 강화하길 바란다. 차별금지가 진심이라면 드러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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