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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울 말고] 너랑 나랑 같이 비누 하자 / 서한나

등록 2020-07-05 18:45수정 2020-07-06 18:14

서한나  |  페미니스트문화기획자그룹 보슈(BOSHU) 공동대표

사는 곳을 사랑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내가 여자이며 여자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오래 걸린 것과 마찬가지인데, 여자보다 남자가 중요하고 대전보다 서울이 중대하다는 세상에서 나에겐 몸과 몸이 놓인 곳을 사랑하기 전에 해결할 게 있었다.

대전에 ‘남아’ 친구들과 잡지를 만들다 대전에 사는 20대를 인터뷰했다. 지방에서 원하는 일 찾기 어렵지 않은지 물었다. 그는 디자인 일을 하고 싶어서 검색해보면 현수막 명함 디자인 업체만 나온다고 했다. 그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물었다. 버스에서 동창을 보면 속으로 쟤도 어디 못 갔구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젊은 애가 쓸 만하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오래된 생각은 젊은 애에게도 스며들어, 태어난 곳에서 쭉 살아도 좋겠다 하는 결심에 의심을 보낸다.

때가 되면 떠나겠다는 생각은 지금 여기 예쁜 것을 사랑하지 못하게 했다. 이를테면 엄마가 쓰레기와 돌을 골라내고 가꾼 텃밭을 대충 보게 했다. 당신 땅이 아닌데도 보기 싫잖아, 하며 오다가다 쓰레기를 줍고 상추와 오이, 풀과 해바라기를 심었다. 아침에 나가면서 걔들 좀 쳐다보고 가, 하루하루 달라, 하는 말을 나는 듣기만 했다.

그런데 술 마시고 집에 가던 어느 밤 이상하게 그것들을 하나씩 들여다보게 됐다. 카카오스토리에 올릴 것도 아닌데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 뒤로 밭을 자주 봤다. 등을 둥그렇게 말고 밭 어디쯤 수박처럼 놓여 있던 엄마는 내가 인사를 하면 허리를 쭉 펴고 일어나 시골에서 태어나 그런가 흙을 만져야 시원하다고, 비가 오면 정수리부터 개운하다고 그랬다. 그 말이 구수해서 좋았다. 엄마가 죽으면 이런 말 못 듣고 그리우면 박완서 소설을 찾겠지 싶었다.

나도 들은 가락이 있어선지 길을 다니다 곧잘 킁킁거렸다. 봄에는 슈퍼에 다녀오다가 훅 끼치는 달큰한 냄새를 맡았는데 날이 따뜻해지자 나무에서 흰 꽃이 피더니 주황색 열매가 열렸다. 사진 찍어 자랑하니 살구나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었다. 살구나무구나, 우리 집 밑에 살구나무가 있구나. 나는 그것을 마음에 들였다. 들이는지 모르고 들였다.

마음이 열리니 의아한 것을 의아하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잠실이니 여의도니 하며 저들끼리 알아듣던 것이나 양화대교 노래가 유행할 때 느꼈던 낯섦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 몸은 대전 궁동이나 선화동, 관저동 먹자골목에서 일상을 보내는데 어째서 이곳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저 먼 데 이름은 외우려고 했을까. 잡지 만들던 친구들과 만든 책 <피리 부는 여자들>에서 내가 한 시도는 아무렴 다른 것이었다. 글 안에서 나는 대전 지명을 그대로 썼다. 그리하여 누군가에게는 처음일 이질감을, 누군가에게는 처음일 반가움을 노렸다. 둘이 손잡고 의아함으로 가도록 만들고 싶었다.

나는 이제 사랑한다고 말한다. 쑥 뜯으러 가는 엄마의 뒷모습이나 그가 뚝딱 만들어내는 밭을. 원하는 곳에서 살며 원하는 것을 해도 좋을 거라는 내 마음을. 지난해 오월에는 군산에 사는 친구가 어머니가 담근 양파김치를 크게 한 통 담아 왔다. 어린 양파가 뽀얗고 굵은 진주알같이 탐스러웠다. 밑엔 찐득찐득하고 빨간 양념이 이불처럼 깔려 있었다. 그걸 얼른 씹어보고 싶어서 라면 물을 올렸다. 입안을 상쾌하게 씻어내리는 매콤하고 달큰한 맛.

살구꽃 냄새와 양파김치 맛으로 시절을 기억하는 일은 운치가 있다. 그러니 어느 밤에 살구나무 주변을 왔다 갔다 하며 듣던 비비의 노랫말을 이렇게 글의 제목으로 삼아보는 것이다. 거기 살구나무에는 밤이면 함께 집으로 들어가던 사람의 얼굴이 걸리고 빙글빙글 어지러운 술기운이 걸리고 보름달 보러 내려오던 날의 공기가 걸리고 이 나무를 오래 보고 싶다는 마음이 모든 걸 묶는다. 시간이 가도 이 나무를 좋아할 것이다. 향기를 외면하는 법을 나는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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