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숨&결] 아끼는 게 실력이다 / 김민식

등록 2020-07-06 19:15수정 2020-07-07 09:59

김민식 ㅣ <문화방송>(MBC) 드라마 피디

둘째 딸이 중학교에 올라가자 코로나가 터져 온라인개학을 했다. 스마트폰도 없는 아이인데, 원격 수업은 어떻게 듣지? 노트북을 사줄 형편은 안 되고, 태블릿 피시라도 구하려고 보니 유명 브랜드 제품은 가격이 상당했다. 나중에 등교개학하면 안 쓸 물건인데 굳이 비싼 걸 사야 하나? 한참 고민하다 12만원대 저가형 태블릿을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온라인개학이 며칠 앞으로 다가온 어느 날, 아내가 물었다. “그래서 당신이 주문한 태블릿 피시는 언제 와?” 갑자기 난감하다. “음… 그게 실은 워낙 저렴한 제품이라, 해외배송인데, 확인해보니 오는 데 2주가 넘게 걸린다고.” “뭐? 당장 내일모레 개학인데 어떻게 할 거야?” 눈물을 머금고 내 노트북을 아이에게 빌려줬다. 태블릿이 오면 아이가 “우와! 이거 내 거야? 고마워, 아빠!” 하며 돌려줄 줄 알았다.

택배로 도착한 태블릿을 본 아내와 딸의 반응이 싸늘했다. “이거 얼마짜리라고?” “12만원.” “응, 딱 그만한 가격일 것 같아.” “아니 뭐 아이패드나 갤럭시탭을 기대한 건 아니잖아?” “그래도 이건 너무한데? 이건 그냥 당신 써. 아이는 당신 노트북으로 계속 수업 듣고.” 딸도 옆에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엉엉,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태블릿.

이러한 사연을 인터넷에 올렸더니 댓글이 달렸다. “아이에게 노트북을 사줄 형편은 안 되고, 라는 글을 보고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피디님은 방송사 직원이고, 부인도 커리어 우먼이고, 베스트셀러 저자라, 경제적으로 여유로우실 것 같은데 형편이 안 된다고 쓰시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후배랑 점심을 먹으면 밥은 내가 산다. 후배가 커피를 산다고 하면 그런다. “괜찮으면 회사 휴게실에 가서 이야기를 나눠도 될까?” 그러고는 회사로 돌아와 전용 머그컵에 사무실에 비치된 녹차를 타서 마신다. “형, 제가 살 테니까 그냥 커피숍으로 가시죠?” “정 사고 싶으면 나중에 내가 퇴직하고 찾아오면 그때 밥을 사주면 된다. 밥을 굶을 수는 없지만 이렇게 하면 커피값은 아낄 수 있잖아?” 후배는 속으로 구시렁거릴 거다. ‘저 형은 왜 저렇게 궁상맞게 살까?’

짠돌이로 사는 덕에 즐겁게 산다. 돈을 쓰지 않아도 행복한 사람은, 돈을 벌기 위해 불행을 감내할 이유가 없다. 20대에 첫 직장을 그만둘 때나, 40대에 낙하산 사장 퇴진 운동을 할 때나,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그냥 한다. 돈 때문에 괴로움을 참고 살지는 않는다. ‘노트북을 사줄 형편은 안 되고’란 결국, 아낌없이 돈을 쓸 형편은 안 된다는 뜻이다.

행복의 기준은 무엇일까? 내일 당장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삶의 유한성을 자각하기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즐겁게 산다. 내일 당장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직업, 가족, 지위, 재산, 모든 것을 한번에 잃을 수도 있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다는 자세로 살기에 무언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불안이 없다. 최악을 각오하고 하루하루 살아가면 최선의 삶을 살게 된다.

나의 가장 큰 취미 중 하나가 자전거 여행이다. 나는 24년 된 자전거를 탄다. 낡은 자전거를 끌고 주말마다 춘천, 양평, 강화도 등 서울 근교 여행을 다닌다. 몇년 전 추석에는 자전거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국토종주를 한 적도 있다.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가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생각지도 못한 목돈이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자전거를 바꾸자는 유혹이었다. 꾹 참고 견뎌낸 덕에 지금도 24년 된 자전거를 타고 다닌다.

돈을 벌고 싶을 때 버는 건 실력이 아니라 운이다. 운이 좋아야 돈이 벌린다. 돈을 쓰고 싶을 때 참는 게 진짜 실력이다. 운이 좋아 들어온 돈도 안 쓰고 모아야 늘어난다. 운 좋게 큰돈이 들어왔을 때, 소비 수준을 그에 맞춰 올려버리면, 나중에 고생한다. 돈을 버는 게 실력이 아니라, 아끼는 게 실력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1.

윤석열이 연 파시즘의 문, 어떻게 할 것인가? [신진욱의 시선]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2.

“공부 많이 헌 것들이 도둑놈 되드라” [이광이 잡념잡상]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3.

‘단전·단수 쪽지’는 이상민이 봤는데, 소방청장은 어떻게 알았나?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4.

극우 포퓰리즘이 몰려온다 [홍성수 칼럼]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5.

‘영혼의 눈’이 썩으면 뇌도 썩는다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