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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희진의 융합] 융합은 지향이 아니라 방식이다

등록 2020-07-07 10:34수정 2021-05-11 08:21

정희진의 융합_01
스무살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 1학년
스무살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한국예술종합학교 애니메이션과 1학년

나는 ‘섭(攝)’에는 찬성이지만 ‘통(統,unity)’은 다소 불편하다. 그래서 본연재물에서는 제3의 지식, 변형된 물질로서 융합을 임시로 사용하고자한다. 융합이 연상시키는 퓨전 혹은 용광(鎔鑛)이 융합을 논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최근 몇 년간 한국 사회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인 융합, 통섭, 다학제에 대해 알아본다. 이 글은 융합적 사고방식은 무엇이며, 왜 필요하고, 어떻게 가능한가를 탐색한다. 한국 사회에서의 새로운 사유 방식을 모색해보는 공간으로 특히 글쓰기와 읽기에 관심 있는 독자 청중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격주 화요일마다 연재된다.

한국 사회에서 ‘융합(통섭)’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보여주는 두 가지 실화를 소개한다.

지난해 9월28일 개통한 김포 도시철도(양촌역~김포공항역 28㎞) 지하철 작업장에서 라돈이 기준치의 48배가 검출되었다. 라돈은 흡연 다음으로 폐암 유발 원인 2위인 발암 물질이다. 근본적인 대책이 필요하지만, 일단 여러 명의 노동자가 교대 근무를 해서 1인당 피폭 시간을 최소화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사측인 김포시 철도과와 ㈜김포골드라인 안전경영처에 항의했다. 사측이 한 말은 다음과 같다. “통섭의 시대에는 노동자 한 명이 모든 일을 한다.” 작년 말 이 사건이 제기되었을 때, <한국방송>(KBS) 1텔레비전 9시 주말 뉴스에서 방영한 내용이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사고처럼 2인1조가 필요한 업무를 한 명이 하다가 사망 사고가 나는 것이 통섭이라면, 끔찍한 일이다. 말할 것도 없이, 통섭은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두 번째는 내 경험인데, 융합을 강의하는 어느 대학교수가 학회에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정 선생(나), 융합에 관심이 많으시지요? 그런데 저는 솔직히 반대입니다. 융합이 말이 됩니까. 지금은 전문가 시대예요. 내가 심장 수술을 한다고 칩시다. 최고 전문가가 맡아야지. 융합 어쩌고 하는 사람들이 수술실에 들어와 제가 죽으면 누가 책임집니까.” 나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고 물었다. “선생님 전공이 융합이고 그걸 가르치시잖아요?” “유행이니까. 교육부에서도 관심이 많고…. 사실, 학생들이 원하는 것은 개별 과목의 복수(複數) 전공입니다. 융합이라고 하면서 복수 전공을 권하지요, 취직 때문에.”

한국 사회의 소통 불가능에 대해, 더 놀랄 일이 있겠는가마는 놀라기에 앞서 걱정이 되었다. 이 오용(誤用)을 어찌할 것인가. 전자는 노동자의 인명 경시를 통한 비용 절감을 “통섭”이라고 주장하고, 두 번째는 융합은 고사하고 전문가(specialist)와 교양인(generalist)도 구별 못 하는 경우다. 이처럼 융합을 전문성의 반대말로 알고 있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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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섭’에서 ‘섭’으로

에드워드 윌슨의 <통섭―지식의 대통합>(Consilience―The Unity of Knowledge)의 번역 출간 이후(2005), 통섭은 지식을 논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되었다. 윌슨의 통섭(統攝)은 실제로는 밀접히 연관되어 있지만 별개로 확립되어 있는 분야들을 종합(synthesis)하려는 시도를 말한다. 각각 전문화되어 있는 환경 정책, 윤리학, 사회과학, 생물학의 사례를 들어 이들 학문 간의 간격이 좁아질수록 지식의 다양성과 깊이가 심화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는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그 관계는 인간 복지 증대에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간단히 말해, <통섭>은 근대에 이르러 대학이 대중화되면서, 학과가 다양해지고 지식이 세분화된 상황에 대한 본격적인 문제 제기다.

나는 이 책이 과대평가되었다고 생각한다. <통섭>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비판인 “여전히 자연과학 중심적 사고”는 부차적인 문제다. 나중에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본디 모든 지식은 융합(融合) 과정 없이 설명할 수 없다. 즉 융합은 지향이라기보다 사유의 방법이다. 인간은 자기가 사는 사회의 언어로 사고하기 때문에, 언어의 그물망(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 융합은 지식 생산의 전제다.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융합을 지향하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융합의 경로를 추적하는 일이다.

에드워드 윌슨은 훌륭한 지식인이지만, ‘백인 남성’은 언제나 크게 주목받는다. 권력과 지식의 문제다. 통섭?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이론은 이미 수십 년 전부터 통섭의 학문이었다. 이들 사상은 태생적으로 ‘백인 남성’ 중심의 지식에 대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실존주의와 여성주의를 ‘융합한’ <제2의 성>(1949년 출간), 헤겔의 변증 개념은 흑인과 백인(혹은 여성과 남성) 사이에는 발생하지 않음을 주장한 정신분석학자이자 혁명가였던 프란츠 파농, 핵물리학자이자 페미니스트 철학자 에벌린 폭스 켈러, 영장류학자로서 생물학과 인문학을 결합시킨 도나 해러웨이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책은 내가 읽은 번역서 중에 번역이 바로 통섭(trans-)임을 보여준, 번역자의 문화(적) 번역, 문제의식과 열정이 가장 잘 표현된 책이다. 융합 혹은 통섭을 논할 때 번역자인 최재천·장대익 교수 이야기를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번역은 다른 사회와 나의 현장(local)을 동시에 읽어내는 작업인데, 이 책은 그 노고가 역력하다. 그래서인지 한국 사회에서 <통섭>은 ‘최재천의 책’으로 더 유명해졌다. 나 역시 통섭이 ‘consilience’의 가장 가까운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다른 표현을 제안해본다. 바로, ‘섭(攝)’이다. 섭은 ‘당기다’나 ‘거느리다’, ‘다스리다’ 등 통섭에 해당하는 적절한 뜻이 있다. 무엇보다 ‘攝’의 생김새가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하다. 손(手) 하나와 귀(耳) 세 개가 결합되어 있다. 섭(聶)은 소곤거리는, 가까이하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는 귓속말을 뜻한다. 그러므로 여기에 ‘手’를 결합해야 한다. 잘 들리지 않으므로 귀에 손을 대어 ‘끌어들이는’(통섭) 것이다. 여기서 “잘 안 들리는 소리”는 소수자의 목소리, 가시화되지 못한 진실, 보이지 않는 현실, 특정한 시각에서만 발명(‘발견’이 아니다)되는 팩트 등으로 해석 가능하므로, ‘攝’은 멋진 글자가 아닐 수 없다.

요약하면, 나는 ‘섭’에는 찬성이지만 ‘통(統, unity)’은 다소 불편하다. 그래서 본 연재물에서는 제3의 지식, 변형된 물질로서 융합을 임시로 사용하고자 한다. 융합이 연상시키는 퓨전 혹은 용광(鎔鑛)이 융합을 논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통섭>의 번역자들이 말했듯 통섭은 다학제(多學制), 간(間)학제에 머물지 않는다. 다학제와 간학제는 ‘화학적’이기보다 ‘물리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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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 일관된 이론의 실

최재천 교수는 다학제, 간학제를 넘어 “이제는 진정 학문의 경계를 허물고 ‘일관된 이론의 실’(필자가 강조)로 모두를 꿰는 범학문적(trans-disciplinary, -는 필자가 삽입) 접근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것이 바로 통섭의 시대를 맞이하는 길이다”라고 말했다.

최재천 교수가 말한 “범학문”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융합은 ‘凡’이든 ‘汎’이든 모든 것을 뜻한다기보다는, 영어의 트랜스라는 말뜻 그대로 변화(translation)를 의미한다. 한국어판 부제인 “지식의 대통합”은, 모든 지식을 다 공부해서 묶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가능하지도 않고 불필요한 일이다. 통섭은 100V가 200V로 전환되는 트랜스포머(transformer, 변압기)처럼 질적인 변화인, 횡단(橫斷, trans/versal) 작업이다. 이제까지 “일관된 이론의 실”은 백인 남성 중심의 단일 보편성(uni/versal)이었다. 보편성을 비판하며 등장한 다양성(poly/versal)은 또 다른 위계를 숨기고 있다. 흑과 백은 다양한 가치가 아니다. 이 차이를 같은 가치로 포장하기 위해 사람들은 관용을 내세운다.

거듭 강조하건대, 융합은 ‘범학문’이라는 표현처럼 모든 것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 아니다. 융합은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 등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지식이 만나서 새로운 앎을 만들어내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그래서 나는 ‘횡단적 사고’, ‘사선(斜線)으로 보기’, ‘크로싱’, ‘조우(遭遇)’가 통섭으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통합하고 연결한다고 지식의 양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며, 이는 통섭이 지향하는 바도 아니다.

<통섭>에는 명문이 즐비하다. 융합의 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다음이 아닐까. “과학 이론은 반례들에 직면하면 폐기되도록 특별히 설계되어 있다. 그것이 이왕 틀린 것이라면, 빨리 폐기되면 될수록 좋다. ‘실수는 빨리 할수록 좋다’라는 격언은 과학적 실천에서도 하나의 규칙이다. 과학자들도 자신이 만든 구조물과 사랑에 빠지고는 한다. 물론 나도(윌슨) 예외는 아니었다. 불행히도,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점을 보이기 위해 평생을 헛수고하는 과학자들도 있다. (…) 이론은 거듭되는 장례식을 통해 진보한다.”

다음 회에는 글의 서두에 소개한 사례처럼, 한국 사회에서 융합이나 통섭에 대한 수많은 오해들을 살펴봄으로써 융합의 ‘본뜻’에 다가가보고자 한다.

정희진│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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