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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선언하는 일 / 이길보라

등록 2020-07-08 18:42수정 2020-07-09 02:38

이길보라 ㅣ 영화감독·작가

한 편집자가 물었다.

“그동안 써왔던 글을 정리해보면 ‘선언’에 가까운 칼럼이 많은 것 같아요. 감독님은 왜 선언적 형식과 내용을 담은 글을 계속해서 써왔던 걸까요?”

다시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콘셉트를 잘 잡아 조금 더 대중적이고 말랑말랑한 글을 써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한 달을 넘게 고민했다. 그런데 마감 전,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 ‘웰컴투비디오’ 운영자 손정우씨에 대해 법원이 미국의 범죄인 인도 청구에 응하지 않겠다고 판결했다. 손씨의 아버지는 “재판부의 현명한 판단에 감사한다”고 했고, 손씨는 구치소에서 풀려났다.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의 가해자로 대법원에서 3년6개월의 실형을 받은 성범죄자 안희정 전 지사의 모친상에 ‘페미니스트’ 대통령을 비롯한 정계 인사들이 직함을 담아 근조 화환을 보냈다. 성범죄자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풀려났고 재기했다. 분노와 좌절감에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참담한 월요일이었다.

내가 쓰는 글을 꼬박꼬박 찾아 읽는다는 독자가 말했다.

“이길보라 감독은 낙태, 몰카, 페미니즘 그런 거 말고 가벼운 글을 쓰면 좋겠어. 농인 부모 얘기하면서 장애, 배려, 따뜻한 세상 같은 거 말하면 이미지에도 좋잖아. 앞으로 큰일 하려고 할 때 발목 잡힐지도 모르는데.”

나도 그러고 싶다. 그 누구도 불편하게 하지 않으며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런 글을 쓰고 싶다. 그런데 자꾸만 내가 나고 자란 국가와 사회가 발목을 붙잡는다. 발목을 잡는 건 딴게 아니라 바로 이러한 부조리들이다. 수많은 피해자와 생존자들의 용기 있는 미투, 연대의 위드유가 있었음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남성연대와 사법부, 정계, 피해자의 심정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을 그들만의 공고한 리그와 선택들 말이다.

나,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말할 것이다. 발목, 그런 거 잘 모르겠고 내가 하는 일이 무언가를 발화하는 일이 된다면, 발화를 촉진할 수 있다면, 그것이 ‘선언’의 행위가 될 수 있다면 그리할 것이다. 멈추지 않고 생각하고 쓰고 투쟁하는 일이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권김현영의 말처럼 “언젠가는 우리가 이길 것이며 그러므로 바로 지금 우리는 이기고 있다”는 메시지가 된다면 기꺼이 그럴 것이다. 월요일에 닥친 두 가지 뉴스에 분노했던 이들은 절망스럽지만 그래도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자며 아래와 같은 행동을 제시했다. 법원 누리집(홈페이지)의 ‘법원에 바란다’에 민원 제기하기, 법원 부조리 신고센터에 세 명의 판사 신고하기, 법원에 탄원서 보내고 전화하기, 법원 앞에서 시위하고 기자회견 하기, 판결을 내렸던 판사의 대법관 후보 자격 박탈에 대한 국민청원 동의하기, 법관 탄핵 제도를 추진 중인 국회의원 후원하고 응원 문자 보내기, 지역구 국회의원에게 내 의견을 대신 발의하고 추진할 수 있도록 문자 보내고 전화하기, 그리고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력을 세상에 알리고 싸웠고 생존했으며 일련의 과정을 기록하여 책으로 펴낸 김지은씨의 <김지은입니다>를 여러 권 구매하여 널리 선물하기. 무소불위의 권력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처럼 작고 미미하다. 법원의 결정을 무를 수도 없고 법관을 탄핵할 수도 없다. 그렇지만 이대로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권력이 우리를 호명하기 전에 스스로를 부르고 명명하고 선언하고 발화하고 응답해낼 것이다.

나는 선언한다. ‘웰컴투비디오’에 올라온 22만여 건의 아동 성착취 영상으로 피해를 입은 영유아를 포함한 피해자들을 위해, 잠재적 범죄의 대상이 되어버린 아동들을 위해, 김지은씨를 위해, 이 땅의 수많은 김지은들을 위해, 이 두 가지 뉴스로 성범죄를 저질러도 세상은 뒤집어지지 않는다는 착각을 하고 있을 이들을 향해, 대한민국의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를 향해, 그리고 온전히 나를 위해. 우리는 지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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