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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울 말고] ‘서울 큰 병원’ 말고 / 권영란

등록 2020-07-19 17:04수정 2020-07-20 02:39

권영란 ㅣ 진주 <단디뉴스> 전 대표

빼꼼 열어놓은 창으로 두런두런 들리던 소리가 어느새 짜랑짜랑하다. 우리 동네 할매들이다. 내내 비 내리다 오후 들어 잠시 갠 틈을 타 금세 모여들었을 게다. 6.5평 내 작업실 뒤 골목은 앞에 공터가 있는데다 동네에서 가장 시원한 ‘바람길’이다. 한 블록 떨어진 경로당은 비좁기도 하고 월 회비 5천원을 내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오다가다 눌러앉기가 여기 골목이 제일 만만한지 일 년 열두 달 라디오 정규방송처럼 할매들 동네 방송이 이어진다.

“비 때매 내치 있응께 오만 데가 다 쑤시구만. 자빠져도 말 몬헌다이.”

“요번 도지사가 도립병원을 새로 지을 꺼라카대. 그랑께네 말라꼬 억지로 없애가꼬.”

“버스도 잘 안 댕기는 저짝 구시로 갈 때부터 사단이 났끄만. 이짝 있을 때 세사 편터만.”

“이참에 새로 지으모는 오데다 지을끼꼬?”

뭔 얘긴가 했더니, 최근 경상남도에서 추진하는 서부경남 공공병원 신설 건이다. 대부분 70대 중반을 넘은 우리 동네 할매들은 공공병원이라는 말이 어렵고 생소하다. 새댁 시절부터 아이들 줄줄이 세워 드나들던 ‘도립병원’이 익숙하다. 할매들 기억 속 도립병원은 경상남도진주의료원을 말한다. 나랏돈으로 만든 병원의 대명사였던 도립병원은 지레 돈 걱정에도 그나마 아픈 애를 둘러업고 달려갈 수 있었던 문턱이었다. 도립병원이 경상남도진주의료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없어진 지 오래고, 자신들도 육아와 노동에서 벗어났고, 형편도 그때보다 좋아졌지만 여전히 ‘도립병원’으로 기억하는 이유이다.

최근 서부경남권 공공병원 설립이 추진 중이다. 홍준표 전 경남지사가 2013년 적자를 이유로 진주의료원을 폐업한 지 꼭 7년 만이다. 경남도민은 홍준표 지사 시절, 한 개인이 정치적 이익과 성과를 위해 국가 공공의료체계의 근간을 뒤엎는 행위를 이미 뼈아프게 경험했다. 당시 홍 지사는 생명보다 돈이 더 우선이었고, 진주의료원의 적자가 채무제로 경남을 위협하고 있다고 했다. 도민과 각계각층의 반대 여론에도 폐업을 강행했다. 대법원은 진주의료원 폐업을 ‘권한 없는 자의 위법한 결정’이라고 판결했다.

새 서부경남권 공공병원은 어느 지역에 설립할 것인가를 두고 지역 간 갈등이 팽팽해질 것이라 우려됐다. 하지만 애초 우려와는 달리 현재 서부경남공공의료확충공론화협의회와 경남도의 추진 과정을 두고 제법 긍정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얼마 전에는 산청 남해 사천 하동 진주 거창 함양 지역 100명의 도민이 참여하여 서부경남 의료 현실을 진단하고, 주요 개선과제와 신설 병원의 기능과 역할 등을 토론했다. 한 차례에 그치지 않고 네 차례의 토론회가 이뤄졌으며,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과 민간병원 쪽도 적극 의견을 냈고, 최종적으로 서부경남 공공의료 확충에 따른 합의문을 끌어냈다고 한다.

여하튼 다행한 일이다. 우리 동네에서는 자식을 서울로 대학 보내는 게 자랑이듯 부모가 병들면 ‘서울 큰 병원’으로 보내는 게 자식의 위세다. 한 집안의 능력과 경제력의 척도이기도 하다. 진로, 취업, 치료 등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서울에 가느냐 못 가느냐’로 계층이 갈리는 게 우리 동네 현실이다. 늙어 병들었을 때 개인의 경제력이나 자식의 능력으로 갈 수 있는 병원이 다르고 치료받을 수 있는 수준이 달라진다면, 1인 독거가 30%를 웃돈다는데 자식도 없고 경제력도 없는 이들은 병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싶다. “병원 가모는 아파 죽는 기 아이고 치료비 땀시 죽는다 쿠더라”는 동네 할매 말에 숨이 턱 막히지만 고개를 끄덕인다.

이번 공론화 자리가 매회 진지했고 뜨거웠으며, 어느 정도 가닥이 잡혔다는 소식에 순진하게 또 바란다. 멀리 있는 ‘서울 큰 병원’ 말고 먹고사는 동네에서 가능케 해달라고. 돈보다 생명이니, 병 앞에서 돈 때문에 비루해지지 않게 해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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