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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희진의 융합] 절충은 융합이 아니다

등록 2020-07-20 18:20수정 2020-07-21 02:36

정희진의 융합_02
스무살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 이미지를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대립하는 논리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융합은 충돌을 지향한다. 충돌하지 않으면 새로움도 없다. 물과 기름이 섞이려면 다른 세계 간의 결합을 촉진하는 계면/활성제가 필요하다. ‘계면활성제’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첫 회분 글이 나간 후, 몇몇 독자의 이메일을 받았다. 가장 인상적인 사연은 필자 소개를 보고 한 독자가 보내온 글이었다. “휴대전화 없이 어떻게 사는지, 요즘은 공중전화도 없는데….” “선생님과 제가 이렇게 메일로 소통하고 있지 않나요?”라고 답장했지만, 내게 공중전화 문제는 융합을 논하기에 좋은 사례이다. 스마트폰이 기술 발전의 산물이 아니라 공중전화와 사회적 가치의 경합을 다투어야 할 ‘문제’로 보이기 때문이다.

전화번호가 주민등록증을 대신한 지 오래다. ‘전번’ 없이는 통화만 불편한 것이 아니라 교통편 예약부터 통장 개설까지 일상이 불가능하다. 나는 시간강사로 일할 때 성적 입력을 못 하게 되자, 결국 2G폰을 구입했고 사용하지는 않는다. 기기가 아니라 번호를 구매한 것이다. 휴대전화를 잊고 외출하거나 분실했을 때 ‘나’ 자체가 실종된 듯한 경험, 누구나 있을 것이다. 국가가 무료로 시민증을 발급하던 시대에서, 개인정보를 독점한 통신회사에 매달 몇만원 이상을 내는 세상이 되었다. 이것이 ‘IT 혁명’이다. 감시료에 대한 자발적 납부, 왜 우리는 저항하지 않는가. 공중전화? 일부 시민이 쓰레기를 버리고 배뇨를 하여 공중전화는 흉물이 되거나 사라지고 있다.

휴대전화 관련 편지를 한 독자도 다소 독특한 분 같다. 내가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면, 대개 사람들은 “그러면 어떻게 사나요?”라며, 내가 불가능한 삶을 사는 양 반응한다. 그러나 이 독자는 짧은 메일에서 공중전화를 여러 번 강조했다. 개인이 각자 가지고 있는 휴대전화와 불특정 다수가 함께 이용하는 공중(公衆)전화를 뚜렷이 대비시켰다. 이 독자의 관심사는 ‘비사회적인 인간’인 내가 아니라 “전화로 통화할 일 있을 때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해서 물어봅니다. 예전처럼 공중전화가 많으면 괜찮은데…… 요즘엔 공중전화 찾기가 힘들어서요”라며 전화(電/話) ‘본래’ 기능에 관심이 많았다.

이 독자는 휴대전화와 공중전화의 대등성을 강조했다. 스마트폰이 공중전화를 대체했다고 보는 시각은 발전주의 관점일 뿐, 자명한 사실이 아니다. 각각 기능이 다를 뿐, 같은 가치를 지닌 기기이다. ‘스마트폰 중독자’도 공중전화가 필요할 때가 있지 않은가. 이름을 밝히기 곤란한 제보나 비밀로 하고 싶은 친밀한 관계 등. 두 기기가 전후(前後) 발전 순서라는 생각을 버리면, 둘은 동시대 같은 위상을 갖게 되고 사회적 가치를 두고 논쟁이 가능하다. 지금처럼 움직일 때마다 휴대전화 번호를 요구하는 상황은 소비하지 않을 권리에 대한 심각한 침해다.

게다가 손안의 컴퓨터, 스마트폰은 몸의 확장이다. 기억은 점차 몸에서 기계로 이전되고 있다. 인간의 몸은 어디까지 확장될 것인가? 디지털 성폭력은 단지 부작용일까…. 생각할 거리가 많아진다. 다른 소비만으로도 보이지 않았던 세상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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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충은 최악의 논리

지난번 글 제목대로, 융합은 지향이 아니라 방식이다. 융합에 이르는 방식 중에 가장 흔한 방법이 ‘반대말, 비슷한 말’ 공부다. 모든 지식은 다른 지식과의 비교나 대비 등을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절대로, 홀로 성립하는 개념은 없다. 모든 개념은 연결의 법칙이 다를 뿐 연결된다.

예를 들어, 근대적 이성 개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와 반대되는(돋보이게 하는) ‘감정’의 발명이 필요했다. 동성애 인권운동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이성애자는 자신의 성 정체성(이성애자)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장애인의 상대어는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이다. 기준이 되었던 개념이 달라지면 새로운 지식이 출현한다.

융합(融合)에 ‘합하다’는 뜻이 있어서 그런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을 나열하는 절충(折衷)을 융합으로 오해하기 쉽다. 절충은 ‘가장’ 대립하는 두 가지 개념에서 ‘제일’ 좋은 것만 나열하는 사고방식이다. 개념들의 접목이 융합이 되려면, 무관한 개념처럼 보이는 것들 사이의 관련성을 설명하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반대 개념은 양립할 수 없으므로 충돌과 모순이 발생하기 마련인데, 이를 절충으로 해소하면 문제가 발생한다. 주변에 흔한 절충의 예를 보자. “전통과 현대, 녹색성장, 서구의 인권과 아시아적 가치, 개인과 전체…” 좋은 말의 나열은 아무런 의미를 발생시키지 않기 때문에, 갈등 봉합이 주요 목적이다. 충돌 과정을 없애는 것이다. 절충이 대개 지당하신 말씀, 진부한 표현, 영혼 없는 연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유다.

절충 방식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조화’라는 말이 동반되고, 또 하나는 근대 서구 콤플렉스가 반영된 ‘식민주의 지식인’의 언어라는 사실이다. 정반대의 개념을 붙여놓으니, 말도 안 되고 지식도 생산되지 않고 작동(practice)하지도 않는다. 좋은 것을 둘 다 가졌다는 자기 위로만 남는다. 즉 현실에서 불가능한 논리이기 때문에 실행력을 가질 수 없거나, 실행된다면 반사회적 언설이 된다. 조화가 불가능한 일방적 언설인 국가보안법이나 진영 논리가 대표적이다.

물과 기름은 절충될 수도 융합될 수도 있다. 물과 기름이 분리된 채 컵에 담겨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지만(절충), 융합은 계면활성제(界面/活性劑)를 사용하거나 기름의 입자를 나노 크기(10억분의 1m) 정도로 줄이는 과정을 통해 마요네즈 같은 제3의 물질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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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도서기의 경우

대립하는 논리의 충돌은 필연적이다. 융합은 충돌을 지향한다. 합치지 말고 충돌 양상을 질문해야 한다.

구한말부터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트라우마는 외세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했다는 인식이다. 19세기 말, 서구가 물질문명을 앞세워 침략하자 동아시아 국가들은 “어육(魚肉)의 화(禍)” 즉 “우리는 물고기 신세”라고 표현할 만큼 혼란과 공포에 빠진다. 사람들은 이 사태를 고유의 사상(道)은 지키되 서구의 기술(器)은 받아들인다는 상상으로 도피했다.

한국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가 그것이다. 이같은 사고는 동도, 중체, 화혼이라는 정신이 원래부터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이러한 ‘정신(道)’만으로는 ‘물질(器)’을 당해낼 수 없으니, ‘우리의 정신과 서구의 물질’을 동시에 추구하여 서구보다 더욱(?) 앞서가자는 논리다.

물론 이는 가능하지 않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로컬의 지배 권력은 ‘한국적인 것, 전통’을 만든다. “페미니즘, 동성애는 서구에서 유래”가 대표적인 주장이다. 나는 묻는다. “그러면, 마르크스주의는 안동 하회마을에서 왔습니까?”

동도서기는 정신과 물질의 이분법을 전제한다. 동도서기는 우리는 물질이 없으므로 정신을 가졌고(東道), 서구는 정신은 없고 물질만 가졌다(西器)는 ‘망상’이다. 이러한 절충 논리만이 우리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내가 아는 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표적인 절충 논리인 동도서기를 처음 문제제기한 지식인은 인류학자 강신표다. 그는 동도서기가 아니라 동도동기나 서도서기만 가능하다고 본다.

절충은 순수한 뿌리가 있다는 몰역사적 사고이다. 실제 인간은 모두 혼종적(混種的) 상태를 산다. 서구에서는 ‘전통과 현대’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근대화를 주도한 서구에게 전통과 현대는 연속되어 있지만, ‘비(非)서구’에게는 전통과 현대가 외부의 침략으로 단절되었으므로 전통은 우리 것이고 모던(자본주의, 민주주의…)은 서구의 것이다. 문제는 그 ‘남의 것’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현실이다. 산업혁명 이래 오늘날까지 국제관계, 글로벌 자본주의를 벗어난 인간의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윌슨의 ‘통섭(統攝)’의 번역과 관련한 편지와 댓글도 있었다. 댓글을 쓴 조성환님과 선행 연구자(윌리엄 휴얼, 심광현, 임춘성 교수)는 횡단의 의미를 살린다는 점에서 이미 통섭(通攝)을 주장했다. 윌슨의 논지는 융합이라기보다 통섭(統攝)에 초점이 있다. 그러므로 윌슨의 개념은 ‘通攝’이 아니라 그냥 ‘統攝’이다.

융합은 충돌하고 같이 도약하는 과정에서(jumping together) 서로의 차이를 분명히 알고, 새로운 사고방식을 모색하는 것이다. 서로의 차이를 알려면? 기득권자가 새로 공부해야 한다. 다음 회에는 이 문제를 다룬다.

정희진 ㅣ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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