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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박노자의 한국, 안과 밖] 병리가 되어버린 한국형 팬덤 정치문화

등록 2020-07-21 16:54수정 2020-07-22 02:40

박정희 공포정치의 피해자들에 대한 고려 없는 박정희 숭배, 박근혜 적폐정권의 피해자들에게 적대적일 뿐인 태극기 집회의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진영의 극렬 팬덤도 기본적 인권의식조차 결여하고 있다. 그저 명망가나 권력자와의 무한한 자기동일시만이 보일 뿐, 권력의 부작용이나 남용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박노자 ㅣ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한국학

최근에 벌어진 서울시에서의 성추행 의혹 사태와 관련해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 의혹 자체는 아니었다. 슬픈 일이지만, 공공 부문을 포함해서 직장 성희롱과 성추행은 한국에서 여전히 만연해 있다. 지난해 여성가족부가 발표한 조사결과를 보면 여성 직장인 중에서 성희롱을 경험한 비율은 14.2%나 된다. 즉, 7명 중 한 사람은 직장에서 성희롱에 노출되는 것이다. 재야 시절 훌륭한 업적을 남기신 분이 성추행 의혹을 받는 것도 놀랍지는 않았다. 권력은 인간의 ‘뇌’ 작용을 크게 좌우하게 돼 있고, 여전히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위계 서열의 ‘꼭대기’에 있는 남성이 보호막 없는 여성 하위자를 상대로 희롱이나 추행을 범할 위험성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지난해 법원 판결로 성추행 의혹이 확인된 고은 시인도 재야 투쟁 시절에 용감하게 싸웠고, 또 일찌감치 평가를 받은 작품들을 남긴 사람이 아닌가? 공적이 있다 해서 성추행을 평생 범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 법이다. 인간은 약한데, 권력이 인간을 부패시키는 힘은 너무 강하다.

나를 정말 놀라게 한 것은, 고인이 된 가해 지목인의 일부 극렬 지지층, 그리고 전체적으로 그가 속한 진영의 일부 열성 지지층의 ‘태도’였다. 여러 가지 공로가 있었던 분의 사망을 애도하는 거야 당연하다. 그런데 그 의혹과 관련된 신문 기사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게시글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정당한 애도를 넘어 피해자에 대한 혐오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거나, 심지어 피해자를 2차 가해 하는 내용이 지나치게 많았다. 가장 흔히 볼 수 있었던 내용은 “4년이나 왜 참았느냐”는 식의 “의심”이었다. 성희롱·성추행에 대한 상식이 이 정도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위에서 인용한 여가부 조사에서 직장 성희롱 피해자들의 82%가 ‘참고 넘어가는’ 것으로 대응을 마무리한다. 공무원 사회에서마저도 성희롱 피해를 신고할 수 있는 채널은 거의 없으며, 피해 호소인이 막대한 인사상의 불이익이나 경력단절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작금의 유감스러운 현실이다. 사실 2차 가해성이 강한 발언이나 각종 ‘음모론’으로 가득 찬 이런 인권침해적 댓글들이야말로 왜 수많은 피해자들이 4년도 아니고 평생 참고 사는지를 아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우리는 여전히 ‘여혐’과 남성의 특권이 강하게 작동하는 페니스 패권의 퇴보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여전한 마초 의식과 인권 감수성의 태부족, 낮은 성인지 감수성 등을 넘어서 이 2차 가해성이 강한 댓글들은 또 다른 문제와도 연결돼 있다. 한국 사회에는 특정 명망가에 대한 무비판적이고 몰개성적이며, 때로는 극도의 공격성을 띠는 ‘팬덤’(열성 지지) 문화가 존재한다. 물론 극렬 팬덤은 정치인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거의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15년 전 황우석 전 서울대 교수의 줄기세포 복제 연구 조작 사건이 터졌을 때 황우석을 ‘사수’하려는 태도를 공격적인 방법으로 표현했던 ‘황빠’ 집단이 출현했다. 과학에 대한 맹신과 민족주의적 열망, 과학을 통한 국제경쟁 의식에 사로잡힌 ‘황빠’들의 집단사고 속에서 황우석은 ‘민족 영웅’의 자리를 점하고 있었다. 황우석의 진면목이 다 드러나도 ‘영웅’에 대한 갈망이 강한 만큼 극렬 지지자들은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황우석의 난자 채취 방식에서 드러난 여성 인권 유린과 같은 문제들은 그들에게는 아예 관심 밖이었다.

정치인들의 극렬 팬덤은 강경 보수나 자유주의 진영에 두루 나타나는 보편적인 문제다. 3년 전 박근혜 전 대통령이 부패와 권력남용 등으로 탄핵 재판을 받았을 때 그 극렬 지지자들은 그를 ‘예수’에 비유하기까지 했다. 무비판적이고, 거의 유사신앙적인 태도의 끝은 이것도 아니었다. 7년 전, 당시 경북 구미시장은 박 대통령의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을 아예 ‘반신반인’이라고 표현했다. 북한을 거의 ‘악마’와 같은 존재로 보는 일부 한국 초강경 보수는, 북한 사람들이 들어도 깜짝 놀랄 정도의 극도로 과장된 수사를 ‘지도자’들에 대해 사용하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자유주의 진영은 이와 같은 숭배에 가까운 무비판적인 태도와 확연히 구별되는, 합리적이며 비판의식이 전제된 진보적 지도자관을 가졌어야 했다. 그러나 가끔 보면 ‘숭배’로 오인될 정도의 태도는 자유주의 진영에서도 확인되곤 한다.

비교적 최근의 일로는, 문재인 대통령에게 ‘장사가 안된다’고 하소연한 시장 상인의 신상정보를 인터넷에 유통시키고, 그 ‘불경한 언사’를 마구 공격한 일부 극렬 지지층의 태도는 태극기 집회의 분위기를 연상케 할 정도였다. 개인정보와 관련된 인권적 고려도, 입장이나 의견 차이에 대한 기본적 존중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민주당의 진보성에 대해 합리적인 의심을 제기한 임미리 교수에 대한 적의에 찬 태도도, 과연 자유주의 진영에 자유주의 정신이 얼마나 살아 있는지 고민하게 만들 정도였다. 결국 성추행 의혹에 휩싸인 자유주의 진영의 유명 정치인이 극단적 선택을 한 상황에서 오로지 그 의혹을 제기한 피해자에게만 모든 화살을 돌리는 태도 역시 이와 같은 극렬 정치 팬덤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정희 공포정치의 피해자들에 대한 고려 없는 박정희 숭배, 박근혜 적폐정권의 피해자들에게 적대적일 뿐인 태극기 집회의 분위기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진영의 극렬 팬덤도 기본적 인권의식조차 결여하고 있다. 그저 명망가나 권력자와의 무한한 자기동일시만이 보일 뿐, 권력의 부작용이나 남용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우리 편’의 권력자가 무조건, 늘 옳다는 맹신만이 있을 뿐이다.

권력이 ‘다’인 철저한 위계 서열에 익숙해진 사회에서 자신과 특정 권력자를 상상 속에서라도 연결시켜 동일시하려는 욕망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그렇게 해서 권력을 영원히 가질 일이 없는 자신에게 위안을 주는 셈이다. 거기에다가 각종 ‘빠’들을 대량생산하는 것은 원자화되고 극도로 냉소적인 사회에서의 ‘권위’, ‘참다운 어른’에 대한 욕구일 것이다. 어디에서도 믿을 만한 사회적 ‘어른’을 찾을 수 없어 헤매고 있는 신자유주의 사회의 피해자들은, 특정 정치인에게 그들의 욕망을 투영해 그를 유사 가부장으로 ‘모시는’ 것이다. 그렇게 해봐야 이 열성 지지자들을 괴롭히는 신자유주의 폐단들이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다. 극렬 지지가 잘못하면 바로 인권유린으로 이어지는 것도 한국형 팬덤 정치문화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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