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곤 l 제천간디학교 교장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읽고 던진 첫 질문은 이랬다. “멋지네. 그런데 나는 저 유토피아에서 살고 싶을까?” 망설일 필요 없이 “아니다”였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는 유리로 정밀하게 건축한 풍요로운 도시 같았다. 이 나라에는 착취나 부정의, 자원의 고갈, 사치, 경제적 불평등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다만 아내는 남편에게, 연소자는 연장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모든 시민은 자기 마을의 회관에 모여 삼시세끼 함께 식사를 한다. 사회적 약자는 보호되지만 혼전 성교는 금지다.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나는 왜 ‘저런’ 유토피아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고 마음먹었을까? 첫째는 실현 가능성에 대한 의심 때문이었으리라. <유토피아> 제2권에서 정교하게 스케치하고 있는 이상 국가의 세부 기술은 상당히 그럴싸했다. 그런데도 선뜻 마음을 열 수 없었다. 둘째, 뭔지 모르겠지만 그 사회는 인간의 본성과 결이 맞지 않았다. 인간이 지닌 부정적이고 어두운 습성과 내면을 그렇게 간단히 무시할 수 있을까? 셋째는 결국 나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었다. 나는 이미 현대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 소비하는 주체로 키워졌고, 그에 따라 공동체 따위를 버거워하는 한 조각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의심할 줄 아는 능력과 잔꾀를 두루 갖춘 ‘주체’가 됨으로써 ‘태초의 순수’를 상실한 셈이라 하겠다.
한병철은 그의 <투명사회>에서 디지털미디어 사회를 철학자의 눈으로 분석한다. 기묘하게도 <투명사회>를 읽으면서 ‘유리로 만들어진 거대 도시 유토피아’를 상상으로 떠올렸다. 한병철에 따르면 누군가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과 떨어져 있는 ‘거리’ 때문에 가능하다. 또한 그 사람은 분명 이름을 갖고 있다. 익명의 누군가를 존경하기 어려우니까. 하지만 디지털 사회에서는 그런 거리, 또는 유명세를 허용하지 않는다. 디지털이라는 판에서는 구경, 즉 화려한 볼거리들이 ‘거리’를 밀쳐내고 그 빈자리를 차지한다. 모든 이들은 관음증적 태도로 다른 모든 이들을 쳐다본다. 그들이 가진 이름은 ‘익명’이다. 디지털 사회는 내밀하고 사적인 영역마저 노골적으로 전시한다. 부대낌, 불편 견디기, 상대방에 대한 끈덕진 설득의 과정들이 생략된다.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으로 지어진 세상은 크리스털 유리로 조립한 디지털 유토피아와 똑 닮았다. 쾌적하고 세련되어 보이나 인간미를 찾아보기 어렵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우리 학교 아이들은 2003년 이후에 태어났다. 스마트폰의 기술변화에 발맞춰 신체가 성장 진화한 세대이다. 분명히 느낀다. 아이들은 무엇인가 알게 되면 곰곰이 삭이는 시간을 갖지 않고 바로 옆 친구에게 옮긴다. 그 내용이 좋은 것이든, 큰 파장을 일으키게 되는 사소한 비밀이든 상관없다. 하워드 가드너의 표현대로 ‘앱 제너레이션’이 탄생했다. 외면화되고 포장된 자아, 위험 회피 성향, 불안감 증가 등이 그들의 특성이다. 인터넷과 스마트폰 기술이 투명사회를 열어젖혔고, 앱 제너레이션들은 그곳 주민으로 시민권을 얻어가고 있다.
디지털 투명사회가 불러올 비인간화 현상에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유리성을 깨고 모래성이라도 지어야 한다. 땀을 흘리고, 촉각을 통해 자연과 타인을 느껴봐야 한다. 안 풀리는 인간관계 때문에 좌절을 겪어야 한다. 성장은 축복이며 저주다. 둘 사이의 변주 속에서 아이는 정체감을 형성하고, 건강한 자아를 소유한다. 코로나19 재앙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이기도 하다. 등교개학 이전에 아이들과의 ‘접촉’이 없으니 고립된 교사들이 채운 공간은 배움터가 아니라 텅 빈 건물이었다.
작품 <유토피아>는 현실 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펼칠 때 더 멋졌다. 주인공 라파엘은 이렇게 절규한다. “현금이 모든 것의 척도인 한, 나라를 공평하고 행복하게 통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삶의 최상의 것들을 최악의 시민들이 쥐고 있는 상황에서 정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어떻게 하면 최상의 것들을 시민들 손에 쥐여줄 것인가? 사람들이 투명한 유토피아를 향해 질주할수록 내 마음은 디스토피아로 줄달음친다. ‘언택트’ 시대에 교육을 살리는 ‘접촉’은 어떻게 복원시킬 것인가?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