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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숨&결] 빛과 그림자 / 이주희

등록 2020-07-27 16:38수정 2020-07-28 14:33

이주희 ㅣ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

눈부신 빛 뒤편에 서본 적이 있는가. 찬란한 빛은 그만큼 짙고 어두운 그림자를 남긴다. 압축적 경제성장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우리 사회는 극단적인 경제 양극화와 갈등적 노사관계라는 깊은 늪에도 빠지게 되었다. 지독했던 독재의 종결을 가져온 성공적인 민주화 운동의 강렬한 빛 속에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금지와 같이 실질적 민주주의 실현에 필수적인 다른 이슈들이 시들어가고 있다.

인권변호사이자 시민운동가로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준 한 정치인이 여성 비서의 미투 고소를 계기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성에게 참으로 차별적인 우리 사회에서 변함없이 여성의 편에 서주었던 그였던 만큼 그 충격은 남달랐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해주었더라면 어땠을까. 우리 사회 보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무언가 유용한 성과를 거둔 사람의 치명적인 과오에 무척이나 관대하다는 것이다. 반공이나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친일 행적이나 독재에 비판적이지 않은 것처럼. 그래서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반대편에 서 있었던 사람이라 할지라도 이 사건에 대해서만큼은 그런 일관된 사고체계를 유지해주기를, 항상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서서 일했던 그의 공을 인정하여 품위 있는 침묵으로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기를.

반대로, 진보에 대해서도 역시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그 비통함과 아쉬움이 보수 진영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하더라도 그간 고통받았던 모든 여성 피해자와 우리 사회 왜곡된 성 의식의 변화라는 대의를 위해 더 큰 자성의 목소리로 다친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기를, 적극적으로 재발을 방지하는 대안을 논의해주기를.

친일과 성추행은 그 경중을 직접 비교하기 어려운 다른 종류의 과오이지만 그 발생 경로는 유사하다. 늘 살던 대로 사는 과정에서, 늘 하던 대로 하는 중에 저지르게 된다. 태어나 보니 일본이 통치하고 있었고 그 세력에 부역하면 큰 이득을, 부역하지 않으면 큰 피해를 입게 되는 상황에서 누구나 했던 것 아닌가. 나는 상대도 기대했을 법한 친밀함의 표현을 했을 뿐, 암묵적 관행으로 다들 그러고 사는데 왜 나만 갖고 그러는가. 그렇다면 어떻게 친일 행적에는 관대하면서 성추행에는 비판적일 수 있는가. 어떻게 성추행에는 관대하면서 친일에는 비판적일 수 있는가.

늘 살던 대로 살고 하던 대로 하면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성 관련 문제가 현 집권 세력에게서 많이 발생하는 것은 그 이전이나 또 다른 집단에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지금 그들이 권력을 가지고 있는 바로 이 순간 피해자가 그동안 주어지지 않았던 발화의 기회를 갖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모든 빛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듯, 그림자 역시 빛을 향해 다시 나아가고자 하는 간절함을 안고 있다. 이 비극적 사건을 계기로 수많은 여성이 조용히 일을 그만두고 말없이 피해의 현장을 떠나는 일이 더이상 계속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직장 내 위계에 의한 성희롱과 성폭력은 노동자의 존엄성이나 정신적, 신체적 온전함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을 넘어 여성이 노동시장에서 경력을 쌓는 것을 막고 인적자본의 축적을 방해한다. 윤리적으로 큰 문제가 있는 행위일 뿐 아니라 이를 방임하는 조직이나 당하는 사람에게 모두 이롭지 못한 일이다.

정신분석학자 융은 우리에게 숨겨진 무의식의 요소를 그림자로 설명한다. 외부에 공개되는 도덕적이고 선한 자아의식에 포함되지 못한 억압된 본능인 그림자는 우리가 이를 부정하고 억누를수록 더욱더 어둡고 위협적으로 변해간다. 따라서 우리 삶의 주요 과업은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통합을 통해 한 단계 더 진전하는 것이다. 그림자 원형은 개인에게만 존재하지 않고 집단적으로도 존재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를 밝은 빛 속으로 다시 끌어내는 것, 그래서 그 어두움과 용감하게 대면하는 것, 그것이 이 비극을 치유하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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