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복주|정의당 여성본부장
아마도 1999년, 은행 콜센터에서 비정규직으로 전화상담원으로 일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졸업예정자 400여명, 명예퇴직한 전직 은행원 100여명, 장애인 30여명이 채용되었다. 모두 여성이었고 나는 장애여성으로 입사를 했었다. 600여명의 여성들은 종일 부스에서 이어폰을 끼고 고객의 민원 전화를 응대하는 일을 했었다. 그때는 비정규직도 생소하고 은행 콜센터도 생소했던 터라,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한 나의 10대 동료들은 ‘안정적인 은행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차츰차츰 알게 되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장애여성 동료들은 짧은 휴식시간과 콜 압박 때문에 힘들지만 견디고 있다는 말을 종종 했었다. 나는 이곳에서 2년 남짓 일을 했는데, 아직도 그 당시 나의 부끄러움을 잊지 못하고 무겁게 남아 있는 장면이 있다.
정규직은 계장, 과장, 센터장이 있었고 비정규직 직원을 관리하는 ‘정식’ 행원들이었다. 그래서 정규직은 행원, 비정규직은 상담원이라고 구분해서 불렀다. 급여도 비정규직 상담원은 105만원 정액을 받았고, 정규직 행원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었지만 두세배는 많았던 것 같다. 하는 일은 동일했지만 신분이 달랐다. 왜 같은 일을 하는데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다른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정규직 노조를 조직하려고 했었다. 먼저 장애여성들을 만나 이야기하고 삶을 공유하면서 차분하게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다 어느 날은 노조를 만들어 부당한 구조에 맞서 싸우자는 결의를 하기도 했었다. 우리는 장애여성 노동자들에게 장애에 따른 업무 보조기구를 설치해주고, 휴게공간과 화장실 이용의 편의 등을 보장해달라는 요구사항도 작성했었다. 무엇인가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도 있었고 용기도 생기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한 장애여성이 부당하게 저평가를 받는 일이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규직 노조와 면담도 하고 사쪽에 항의를 했지만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고 해결도 못 했다. 그때부터 나는 사쪽에 찍혔고 결국 사표를 냈다. 노조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끝내 그만두고 말았다. 그때 조금 더 견디고 싸워서 600여명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과 노조를 조직해서 목소리를 내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하면 깊은 후회가 남는다. 그때도 지금도 작은 부스에서 이어폰을 끼고 고객을 응대하는 전화상담원들은 콜대기 표시등을 보면서 긴장하며 노동하고 있다. 귀와 목을 보호할 수 있는 시간, 화장실을 제때 갈 수 있는 시간이 확보되길 바란다.
부스 안에서 이어폰을 끼고 모니터를 보면서 고객을 응대하는 상담원 뒤로 누군가가 와서 상담원의 목덜미, 귓불, 어깨, 머리를 수시로 만져대는 장면을 자주 목격했고 나 또한 그런 경험이 있었다. 소름이 돋고 깜짝 놀라지만 고객을 응대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리를 지르지도 못한다. 명백한 성추행임에도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나조차도 항의하지 못했다. 가해자는 센터를 총괄하는 남성 상급자, 단 한 사람이었다. 일주일에 한두번은 그런 장면을 목격했다. 그중에서도 우리 부스에 함께 있었던 10대 동료는 지속적으로 성추행을 당했다. 어느 날 나의 동료는 조용히 그만두었다. 이후 소식을 듣기론 그녀는 우울증으로 병원에서 치료 중이라고 했다.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은행을 그만두고 성폭력상담소에서 피해자를 만나 상담하고 지원하면서 내 마음 한편에선 늘 그때의 제대로 몰랐던 나를 자책하고 반성했다. 직장 내에서 발생하는 성희롱, 성폭력은 성차별적 조직문화에서 비롯되고 이를 방관하고 묵인하고 용인하는 태도로 인해 지속된다. 그때 나는 두려웠고 방관했다. 직장에서 지시를 받는 낮은 위치에서 동료 피해자를 지지하고 연대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했다. 그때 부끄러웠던 방관자에서 아닌 것을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차별을 인지하고 말할 때 평등해질 수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