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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정희진의 융합] 융합은 차이를 재해석, 재배치한다

등록 2020-08-03 18:32수정 2020-08-17 14:03

정희진의 융합 _03
스무살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스무살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인간이 만든 차이를 두고, “차이는 인정하지만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언설은 난센스다. 이는 사회적 구성물인 차이를 본질적인 속성으로 전제한다.

청매실이 익으면 황매실이 된다. 황매실 중 큰 것은 살구와 모양이 비슷하다. 얼마 전 친구에게 황매실로 만든 매실청을 갖다주었더니, 그녀는 살구라고 주장했다. 내가 직접 나무에서 따서 만든 것이므로 논쟁거리가 아니었지만, 친구는 평소 황매실을 본 적이 없기에 살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진실’은 나만 알게 되었다. 직접 농사를 짓는 분에게 물어보니, 살구는 둘로 쪼개면 씨와 과육이 깨끗이 분리되는데 매실은 그렇지 않다면서, 내 앞에서 실연해 보여주었다. 나는 이 사실을 친구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실연을 보지 못했으므로, 내가 강하게 주장하면 괜히 자존심 싸움을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살구와 황매실은 다른 과실이지만,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 기준도 다를 수 있다. 나는 친구가 평소 소화 불량을 호소해서, 위장에 좋은 매실청을 주었다. 나와 친구와의 관계에서 황매실과 살구의 중요한 차이는 효능이었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차이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

만물 중에 같은 것은 없다. 우주는 차이들로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그 많은 차이들 중에서, 우리가 아는 차이는 얼마나 될까? 이 질문은 의외로 쉽다. 사회가 선택한 차이만 차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차이라고 알고 있는 것은, 모두 인간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차이는 분업이나 차별의 필요에 의해 발명된다. 그래서 어떤 차이는 다양성으로 인식되지만, 어떤 차이는 차별의 ‘이유’가 된다.

인간이 만든 차이를 두고, “차이는 인정하지만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언설은 난센스다. 이 언설은 사회적 구성물인 차이를 본질적인 속성으로 전제한다. 이때 차이를 해결하는 방식은 공정함이 아니라 배려와 관용이다. 차이는 해소, 인정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서는 안 된다. 융합은 차이의 발생을 추적, 분석하는 사유, 즉 권력과 지식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자연스러운 차이는 없기 때문이다.

소통은 불가능하다

차이는 모든 사유의 키워드이자 융합의 핵심이다. 융합을 포함해, 모든 개념은 차이를 어떻게 배치하는가에 따라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융합에서는 왜 차이가 중요할까. 어느 독자가 내게 물었다. “관악기, 현악기, 건반악기, 타악기를 모두 마스터한 사람이 지휘를 하는 것이 융합인가요?” 이렇게 분류된 악기군도 그 안에 다양한 종류의 악기가 있다. 수많은 악기를 피아노의 조성진 수준으로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가능성 여부를 떠나, 융합은 ‘완전 정복’이 아니다. 융합은 생각하는 힘, 다른 방식으로 고민하는 태도이다.

‘융합’을 서로 다른 것을 결합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차이를 어떤 식으로든 ‘처리’해야 한다는 스트레스(?)를 낳는다. 그렇다면, 차이는 소통 가능할까? 예전에 모 기관에서 ‘소통의 인문학’을 주제로 강의를 요청해 왔다. 나는 잠시 ‘사회성’을 잊고, 놀란 듯 이렇게 메일을 쓰고 말았다. “아니? 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소통 불가능성의 인문학’이라면 하겠습니다.”

융합은 협력이나 대화가 아니다. 한국 사회에는 “대화와 상생” 구호가 넘쳐나는데, 구호만 요란한 것도 문제요, 아무 때나 등장하는 것도 문제다. 소통, 대화, 공감. 아름다운 말이지만 항상 지향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소통과 공감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이조차 본디 불가능한 일이다. 대화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왜 안 되는가를 배웠다면, 최선이다.

소통 불가능성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지구에는 78억명의 인간이 산다. 78억개의 개별적 몸이 있다.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몸들이다. 각자가 말하는 순간, 발화(發/話) 내용은 몸의 외부 환경과 섞이게 된다. 타인과 사회의 해석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뜻이다. 일상생활에서 흔히 하는 말, “내 말은 그 뜻이 아니라…”는,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무엇보다, 인류는 공통어가 없다. 이는 축복이다. 만일 한가지 언어(지금은 영어)만 있다면 끔찍한 일이다(완벽한 지배는 완벽한 소통 상태일 때만 가능하다). ‘외국어’는 물론이고 수화, 방언이 대표적이다. 또한, 소통 불가능한 구조의 핵심은 말하는 사람마다 젠더, 계급, 인종 등 사회적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일 겪는 바다. 저마다 자기 입장이 있다. 지배자의 입장을 내면화하든 통념과 상식을 자기 생각이라고 믿든, 모든 개인은 입장이 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상황에서 같은 말을 하는 사람이 무섭다. 이것이 생각하지 않는 상태, 폭력이다. 소통은 가능하지도 않고, 어떤 상황에서는 바람직하지도 않다.

사실, 단어 자체가 정확하게 그 어려움을 표현한다. 한자어 ‘소통’(疏通)의 ‘疏’는 “드물다, 멀다, 사물과 사물 사이에 거리가 있다”는 뜻이다. ‘疏’에는 ‘트이다’도 있지만, ‘소외’처럼 “거리가 있다”는 뜻이 강하다. 영어에서 ‘대화’(conversation)는 개종하다(convert)의 명사형이다. 대화는 서로에게 개종을 요구할 만큼 격렬한 상호 작용이다. 많은 이들이 외로움의 대안으로 타인과의 완전한 일치를 원하지만, 쉽지 않다. 이 긴장을 견디지 못해 진짜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폭력(명령, 통제, 소유)과 섹스는 완벽한 소통으로 오해되는 대표적 인간 행위다. 물론, 그렇지도 않고 그런 소통은 오래가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차이의 재배치, 삶은 지속적인 뉴노멀

어떤 식으로든 차이를 ‘처리’해야 한다는 생각은 융합, 통섭, 다학문적(多學問的) 접근이 애초부터 “차이를 좁히자, 소통하자”는 의미로 잘못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융합의 필요성을 주장했던 이들의 문제의식은 다음과 같다. “근대를 전후하여 대학이 제도화, 증가했다. 전공이 다양화, 전문화되기 시작했다. 독립된 학과들은 자기 복제를 반복하면서 엄청난 지식을 생산했다. 점차 다른 학문에 대한 상호 이해가 어려워졌다.”

나는 이러한 문제의식 전에, 왜 서로를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멀티플레이어의 등장은 최악의 대안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는 자기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면서 다방면에도 조예가 깊은 이들이 등장해, 인간의 ‘능력도’ 양극화되었다. 변호사, 변리사, 약사 자격증을 모두 가진 사람을 요구하게 된 것도 같은 예다.

다른 사회에 비해서는 학제 간 협력과 지식의 다양성이 부족하지만 한국 사회에도 ‘협동 과정’이라는 이름의 여성학, 과학사, 북한학, 환경학 등이 몇몇 대학에 대학원 과정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내부도 동질적이지 않다. 여성학, 북한학 연구자들이 모두 ‘여성’과 ‘북한’에 대해 같은 입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다.

나는 특히 ‘협력’이라는 말에 민감한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이 실제로는 약자에 대한 착취인 것처럼 지식 세계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된다. 소수자의 학문은 다른 분야와 상호 협력이 되지 않고, 기존의 지식을 풍부하게 만드는 데 동원된다.

융합은 사회가 요구하는 크로싱, 앎의 변화다. 여기서 필요한 태도는 아는 것을 버릴 수 있는 용기와 다른 입장에 대한 탐구력이다. 평생 동안 확신해왔던 자기 인식과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 새로운 진실에 맞닥뜨리는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다. 간혹 지적이고 윤리적인 이들은 극심한 혼란을 겪고 ‘낭인’이 되기도 하지만(영화 <타인의 삶>을 보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는다.

지식만큼 기득권과 관련된 인간사도 없다. 융합 작업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갖가지 위계다. 시대나 지역마다 숭배, 각광, ‘유행하는’ 지식이 다르다. 말하는 자의 인종, 젠더, 계급에 따라 지식의 차별이 극심하다. 분과 학문 간의 위계, 어떤 학문(발전주의 경제학)은 중요하고, 어떤 학문은 부차적이라는 인식의 결과가 ‘코로나’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차이의 교차로에 놓여 있다. 융합은 차이들을 재배치, 재해석하는 것이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의 사유가 필요하고, 그런 면에서는 기존 인식과 갈등 상황에 있는 사회적 약자들의 다른 목소리가 유리하다. 이것이 뉴 노멀이다. 뉴 노멀은 특정 시기에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갱신되어야 하는 생명의 본성이다. 인생무상. 삶에는 정상(正常), 노멀(normal)한 상태가 없는 법이다.

정희진 ㅣ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tobrazi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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