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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세상 읽기] 25년전 창궐한 휴전선 말라리아…대동강 홍수가 두려운 이유

등록 2020-08-06 15:34수정 2020-08-07 02:10

5일 북한 평양에서 우산을 쓴 한 남성이 강물이 불어난 대동강 변을 걷고 있다. 북한에서도 18일째 비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5일 북한 평양에서 우산을 쓴 한 남성이 강물이 불어난 대동강 변을 걷고 있다. 북한에서도 18일째 비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연합뉴스

100년 만의 홍수라던 엄청난 수해가 한반도를 할퀴고 간 1995년 여름. 전방 휴전선 일대에서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비무장지대를 감시하던 군 장병 수백명이 갑자기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더니 두통과 식욕부진을 호소하며 누워버리는 것이다. 군당국은 하루 걸러 증세가 나타나는 알 수 없는 질병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으나 이듬해 여름부터는 완전히 양상이 바뀌었다. 증세를 보이는 장병 수가 수천명 단위로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 군 의료체계가 완전히 마비되는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다. 모든 방역수단을 동원해도 급격히 증가하던 환자는 1998년 여름에 4천명에 이르렀다. 통상 전방에 주둔하는 30만명의 육군 중 5천명은 항상 전방초소(GP) 부근 매복·정찰에 투입된다. 남방한계선 일대에만 10만명이 경계 임무를 수행한다. 그러니 4천명이라는 환자 발생은 지상군의 경계와 작전 시스템을 마비시킬 만큼 엄청난 규모였다. 이런 추세가 2000년까지 이어지는 동안 휴전선 일대의 여름은 공포의 시간이었다.

질병의 원인으로 밝혀진 말라리아는 우리에게는 오래전에 사라졌기 때문에 군당국은 변변한 치료제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가까스로 방역을 하고 치료제를 투입하면서 전방은 정상을 되찾았으나 원인을 제거할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고난의 행군’으로 알려진 1995년께부터 북한은 극심한 식량난으로 소와 돼지가 남아나질 않았다. 흡혈 대상이 크게 줄어들자 일제히 남하를 시작한 수억마리의 ‘모기 난민’들은 휴전선 일대에서 남한 모기들과 만나 새로운 통일 국가를 선포하였다. 이들은 남북한 군 장병들의 적혈구 속으로 발열을 일으키는 원충을 투입하여 적대적 분단세력의 체력을 약화시켰다. 한반도에는 남한과 북한이라는 두개의 국가 외에 정체불명의 또 한 국가가 존재한다. 인간끼리만 분단되어 있을 뿐이지 말라리아를 일으키는 모기, 치명적인 치사율의 유행성 출혈열을 일으키는 들쥐, 열병의 원인인 멧돼지는 분단을 모른다. 2000년 이후 남북협력이 추진되면서 우리가 북한에 방역을 지원하면서 2008년까지 말라리아 환자는 한창때의 10%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 시절에 북한에 방역지원을 중단하면서 최근까지 다시 말라리아 환자가 증가하고 있다. 연간 500명 가까운 환자 발생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 부동의 1위를 점하고 있다.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가 이대로 계속될 경우 대규모 홍수에 이은 북한 방역의 실패가 우려된다. 이는 남한에 1990년대의 악몽을 떠올리게 할 정도의 심각한 파급효과를 초래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작년에 북한에서 남하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멧돼지에 의해 아프리카돼지열병의 홍역을 치른 바 있다. 방역의 위기는 모두 남북관계가 경색되었을 때 벌어진 일이다.

조선중앙TV는 5일 폭우로 물바다가 된 북한 강원도 지역 모습을 공개했다. 차량 바퀴 절반 가량이 물에 잠겼고 도로는 흙탕물로 가득하다. <조선중앙TV 화면> 연합뉴스
조선중앙TV는 5일 폭우로 물바다가 된 북한 강원도 지역 모습을 공개했다. 차량 바퀴 절반 가량이 물에 잠겼고 도로는 흙탕물로 가득하다. <조선중앙TV 화면> 연합뉴스

8월 초에 북한에 시간당 40㎜가 넘는 비가 내렸고 평안도와 황해도, 개성시, 강원도 내륙지역 등에 500㎜가 넘는 폭우가 쏟아졌다. 1995년의 대홍수에 버금가는 수치다. 산을 황폐화시킨 다락밭이 곳곳에서 무너지고 벼는 이삭을 제대로 틔우지 못하게 된다. 천수답인 논은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곳곳에서 뭉개졌을 가능성이 크다. 대동강 범람의 경고가 발령된 상황에서 임진강 하구 일대에서 경계 임무를 수행하는 우리 장병들은 엄청난 황토물에 각종 쓰레기와 농작물, 나뭇조각, 냉장고와 같은 가재도구, 심지어 돼지까지 떠내려오는 장면을 망연자실하게 지켜보고 있다. 어떤 때는 시체까지 수습하는 이 일대의 군 장병들에게는 마치 북한이 통째로 떠내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이렇게 엄청난 부유물이라면 직감적으로 북한의 사회기반이 상당 부분 붕괴되었을 것 같은 조짐마저 느껴진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우리는 ‘비상재난국가’의 출현을 목격하고 있다. 위기 속에서 생존을 도모해야 할 강력한 정부, 계엄 사태에 비견되는 준전시 국가가 재난을 극복하는 불가피한 존재라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남북관계의 단절 그 자체가 재난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단절 속에서 대동강 홍수가 두려운 이유다. 더 이상 북한에 대한 경제제재를 운운할 일이 아니라 우리 생존을 위해 북한과의 포괄적 협력을 결단할 시대가 되었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김종대 ㅣ 정의당 한반도평화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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