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준 ㅣ 전환사회연구소 기획위원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60년 전인 1960년 여름에 대한민국은 날씨만이 아니라 선거로도 뜨거웠다. 4월 혁명 뒤에 내각책임제와 양원제를 채택한 새 헌법을 제정하고서 7월29일에 민의원, 참의원 선거를 실시한 것이다.
자유당이 몰락했기에 양당 체제의 다른 한 축인 민주당의 압승은 기정사실이었다. 그나마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보수정당 일변도인 정치 지형을 바꾸겠다는 혁신정당들의 도전이었다. 당시는 일본의 영향을 받아 좌파정당을 ‘혁신’정당이라 불렀는데, 진보당을 계승한 사회대중당이 있는가 하면 그 밖에도 한국사회당, 혁신동지총연맹 등이 있었다.
선거 결과는 예상대로 민주당의 일방적 승리였다. 민주당은 하원 격인 민의원 선거에서 총 233석 중 172석을 차지했고, 상원에 해당하는 참의원에서도 총 58석 중 31석을 차지했다. 반면 혁신정당들의 성적은 기대에 못 미쳤다. 가장 규모가 컸던 사회대중당이 민의원 4명을 당선시켰고, 참의원에서는 혁신정당들을 다 합쳐도 3석에 불과했다. 그러자 민주당 구파를 이끌던 유진산은 국민이 혁신 세력을 거부했으니 이제는 ‘보수양당제’가 필요하다며 민주당 신구파 분당의 포문을 열었다.
민주 혁명을 겪고 기존 양당 구도가 무너졌는데도 왜 혁신정당들은 기대만큼 약진하지 못했을까? 물론 근본 원인은 분단과 전쟁, 반공 독재의 상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혁신정당 쪽의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혁신정치의 이상과 정책, 역량을 믿음직하게 대변할 대중 정치가의 부재였다. 무엇보다 1956년 대선 돌풍의 주역인 죽산 조봉암이 독재 정권에 희생당하고 남은 빈자리가 너무도 컸다.
몇몇 인물들이 있기는 했다. 가령 사회대중당 소속 민의원 중에 대구에서 당선된 서상일과 강원도에서 당선된 윤길중이 있었다. 본래 보수 정치인이었으나 이승만 독재에 맞서는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받아들인 서상일은 죽산이 사라진 혁신정치계에서 좌장 역할을 했고, 조봉암의 참모로 잘 알려진 윤길중에게는 늘 죽산의 후광이 따라다녔다. 그러나 서상일은 이미 일흔이 넘은 노인이었고, 40대 초반의 윤길중은 진보당의 유산을 오롯이 대표할 만한 그릇은 아니었다.
4월 혁명 정신과 화학적 결합을 이룰 젊은 세대 지도자들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운동도, 학생운동도 잔뜩 얼어붙어 있었던 이승만 독재 아래에서 이런 인물군이 성장할 리 만무했다. 4월 혁명 이후 노동운동, 통일운동이 불붙으면서 새로운 지도자들이 부상할 기회가 열리는 듯했으나 5·16 쿠데타로 이 문은 곧 닫혀버렸다. 대신 당시 40대였던 박정희나 30대였던 김종필 같은 쿠데타 주범들이 새 세대 지도자를 바라는 민심을 저들의 정치적 자산으로 삼게 된다.
60년 전의 이 모습은 4월 총선 이후 우리 상황과 묘하게 겹친다. 대중 항쟁 뒤의 전국 선거들에서 리버럴 정당이 내리 승리한 것도 그러하고, 진보정당의 기회가 되리라던 총선이 보수 양당 체제의 재확인으로 끝난 것도 그러하다. 더 불길한 점은 혁명 혹은 항쟁을 거치고 난 뒤에 맞이한 정치 체제가 사회의 요구에 제대로 부응하지 못하면서 또 다른 독재의 길을 열고 만 제2공화국의 운명이 결코 먼 옛날 일로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정의당은 당 혁신을 논의하느라 분주하다고 한다. 당원 제도나 조직 체계의 변화가 주된 의제라고 한다. 그러나 60년 전 경험은 정작 가장 절박한 혁신 과제는 다른 데 있다고 말한다. 진보정치의 이상과 비전, 덕목을 체화한 새로운 지도자들을 제시하는 일이 그것이다.
60년 전에는 혁신정당이 이 과제에 부응할 여건 자체가 안 됐다면, 지금은 어떨까? 진보정당들은 과연 어떤 답을 내놓을까? 그 답이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진보정치만이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 전체의 운명에도 더없이 중대한 변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