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의 난제를 해결하려면 긴 안목과 끈질긴 인내심을 가지고 어려운 문제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때로는 쏟아지는 욕을 먹으면서도, 때로는 지지자들로부터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용감하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왜 우리 정치에서 용기 있는 지도자가 사라졌을까요? -금태섭
김용태 ㅣ 정치인
2017년 11월, 마크롱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반년 후 프랑스에 갔습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마크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집권 여당 초선 의원들과 야당인 사회당 의원을 만났습니다. 이전 올랑드 정부에서 마크롱과 함께 각료를 지냈던 분도 만났고 그 외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프랑스에 가기 전 마크롱과 집권 여당 앙마르슈의 공약집을 읽어보았습니다. 마크롱은 사회당 올랑드 정부에서 경제 각료를 지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랑스는 사회주의적 전통과 평등주의적 의식이 강하기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약이 사회당 정부의 정책들을 뒤집는 것이었습니다. 국가 부채 축소를 위해 공무원을 감축하고, 친기업적인 정책을 도입하면서 법인세를 낮추고, 국민 대부분에게 감세 혜택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론 실업수당 혜택 범위를 넓히는 동시에 그들에 대한 교육을 대폭 강화하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마크롱은 집권하자마자 자신의 공약을 거침없이 추진해나갔습니다. 경제성장률이 높아지고 실업률이 떨어지는 등 가시적인 경제 성과가 나타났지만 곳곳에서 저항이 생기고 마찰음이 커졌습니다. 지지율은 요동치며 조금씩 하향세를 그렸습니다. 그러나 큰 틀의 국정 방향은 바뀌지 않고 있었습니다.
과연 프랑스 사람들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제가 만난 사회당 의원은 코냐크 지방에서 연속 일곱번 당선된 7선 의원이었습니다. 사회당은 그해 총선에서 300석에서 30석으로 쪼그라든 최악의 패배를 겪었습니다. “마크롱은 사회당 배신자이며 당연히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프랑스 국민들은 마크롱 개혁 때문에 불편하고 불안하다. 그러나 현 상황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는 것 같다. 영국과 독일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아마도 예전처럼 프랑스가 살 수는 없을 것이라 인정하는 듯하다.”
국민이 불편하고 불안해하는데 국정 방향은 바꾸지 않는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지율로 먹고사는 정치인이 민심을 거스르는 정책을 계속 밀고 나가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과연 마크롱은 어떤 방법으로 민심의 역류를 뚫고 자신의 공약을 밀고 나간 것일까요? 그것은 ‘소통’이었습니다. 필사적으로 현장에 나가 당사자들과 토론하고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이 전 국민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되었습니다.
프랑스에 있는 동안 두번의 인상적인 생방송을 보았습니다. 한번은 대규모 공공부문 파업 현장이었습니다. 마크롱은 선 채로 그들의 주장을 몇 시간이나 듣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아니 전체 국민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의 얘기는 잘 들었소. 그러나 당신들의 요구는 내가 국민들과 약속한 공약을 파기하라는 것이니 당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소.” 또 한번은 전국의 크고 작은 지자체장 수백명과 한 연석회의였습니다. 감세 때문에 세수가 줄어든 지자체들이 중앙정부 지원을 대폭 늘리라고 난리였습니다. 마크롱은 그들에게 “지원을 받으려면 먼저 지자체의 공무원과 경비부터 줄이라”고 맞받아쳤습니다. 대통령과 파업 노동자, 지자체장이 격식은 아랑곳하지 않고 국민 앞에서 치열하게 맞붙었습니다. 과연 프랑스는 토론의 나라였습니다.
물론 마크롱이 자신의 공약을 100% 실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노란 조끼 시위로 인해 전국적으로 소요가 계속되자 마크롱은 유류세 인상 계획을 철회했습니다. 강력한 탈원전 공약도 대폭 수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크롱 개혁의 백미라 할 수 있는 연금개혁 또한 답보 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마크롱은 경제적 성과에 힘입어 “프랑스가 돌아왔다”고 선언했지만 중간선거 격인 지방선거에서 참패했습니다. 천하의 마크롱이라고 해도 현실을 도외시하고 국민의 저항을 뛰어넘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여느 정권과 마찬가지로 부침을 거듭하는 마크롱이지만 공약을 밀어붙이든 철회하든 대통령이 직접 현장에서 국민 특히 반대자들과 치열하게 토론하는 모습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노란 조끼 시위 당시 마크롱이 보여주었던 ‘사회적 대토론’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정치 지도자에겐 다양한 덕목이 요구됩니다. 시대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는 의지, 사람들에게 존경과 지지를 이끌어내는 카리스마 등 그 어떤 것도 빠져서는 안 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반대자와 허심탄회하게 토론하고 설득하는 ‘소통의 용기’는 지금 시대 지도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정치에서 ‘소통’이란 말은 한낱 레토릭으로 전락했습니다. 선거제도, 부동산 정책, 검찰개혁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대통령이 나서 이를 반대하는 야당 대표, 전문가들과 격식 내던지고 국민 앞에서 치열하게 토론하고 설득할 순 없었을까요? 금 전 의원님, 지금 우리 시대 누가 큰 지도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