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청년이 ‘정희진의 융합’을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각기 다른 사건을 모두 진보 문제로 파악하는 환원주의. 융합은 적용이 아니라 기존 이론과 불화에서 시작.
어느 독자가 내 글에 한자와 영어 병기가 많다고 지적해서 ‘한국어와 융합’을 주제로 쓰던 중, 비슷한 내용의 신문 기사를 한꺼번에 접하게 되었다. “조국, 윤미향, 박원순 사건은 진보 개념을 재구성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요지의 글들이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위 사건들을 일부 검찰, 일부 보수 언론의 음모나 진보의 문제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나는 세 사건의 일반화가 이들 사건만큼이나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보수 세력은 사건을 ‘꾸민’ 이들이 아니라 한국 사회 문제의 일부로서, 그들이 살아온 방식대로 살아갈 뿐이다.
세 가지 사건은 배경도 다르고, 팩트 여부도 규명되지 않았다. 아니, 규명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가해자가 아니라는 얘기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가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의미다.
융합에 대한 대표적 오해 중 하나는 (학문 간) 대화이다. 융합은 왜, 지금 대화가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이지, 대화 자체에 대한 추구가 아니다. 사건의 어느 부분에 관심을 가질 것인가, 착목 지점을 둘러싼 판단. 이것이 문제의식이요, 융합의 시작이다. 이제까지의 인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 등장했을 때 우리는 원인을 찾는다. 원인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래야 덜 불안하기 때문이다.
2016년 서울시 강남역 인근에서 일어난 여성 살해 사건 이후 ‘놀라운 일’들이 일상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를 반영한 말이 “실화냐?”가 아닐까. 정확히 말하면, 문명사에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은 늘 있어왔지만 글로벌 자본주의와 매체의 폭발이 상호 작용하면서, 뉴스로부터 내 몸을 보호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른 사건, 같은 결론
다른 사건에 같은 결론이라면, 왜 지식이 필요하겠는가. 이 글의 요지는 세 사건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조국 교수, 군 위안부 운동 논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사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사실이냐는 질문 혹은 사상 검증에 버금가는 취조(?)를 받았을 것이다. 심지어 의견이 다른 이들로부터 사회운동 은퇴 압력을 받는 이들도 있다.
서울시장 사건과 관련해서는 “발언하지 않을 권리는 없다”는 주장도 있었다. 수긍할 만한 얘기다. 우리는 말해야 한다. 다만, 새로운 언어로. 아니면, 새로운 언어에 이르는 고뇌를. 어떤 주장도 반례와 모순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를 인식의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나 역시 할 말이 많았지만 ‘표현의 자유’도 용기도 없었다. 그게 병이 되어 코로나, 물난리와 더불어 답답하고 우울한 이들이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세 사건에 대해 여론은 둘로 나뉘었다. 보수 세력의 나쁨과 진보의 성찰 필요성. 누구나 둘 중 하나에만 속해야 했고, 답은 “당신, 그런 사람이었구나”로 귀결되었다. 예전에 국가보안법이 있었다면, 지금은 국가보안법과 시민들의 자발적 상호 검문이 있다. “나도 피해자다, 나는 피해자 편이다” 외에는, ‘보충 의견’조차 비난받는 경우가 다반사다.
세 사건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환원주의(reductionism, 還元主義)의 대표적 사례다. 환원주의를 우리말로 옮긴다면, 모든 문제가 하나의 출구로 빠지는 ‘깔때기(수렴) 이론’ 혹은 “돌고 돌아 언제나 제자리”쯤 될 것이다. 하나의 잣대로 세상을 평정해 버린다. 인간이 겪는 문제는 모두 계급 문제, 젠더 문제, 분단 문제, 언론 문제, 교육 문제, 부동산 문제, 기후 문제, 인성 문제…라는 식의 논리다. 초기 마르크스주의와 일부 페미니즘도 환원주의였고, 이는 변화하지 않는 어느 지식이나 피할 수 없는 경향이다.
애초 환원주의는 근대 자연과학의 시작이었다. 근대에 이르러 인간은 무지의 영역을 “신의 뜻”, “운명”이라고 하지 않고, 특정한 유형을 추적하고 가정(假定)과 주된 작동 원리(모순)를 고안하기 시작했다. 근대 과학의 토대가 된 환원주의는 요소(要素/要所)라는 개념을 만들어 이를 기반으로 각 분야에서 수많은 지식을 생산했다.
하지만 세상은 복잡한 법. 인간사는 합리적이지 않고 법칙대로 움직이지도 않는다. 한 가지 시각으로는 문제를 파악할 수도 해결할 수도 없다. 아니, ‘해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무엇이 해결인가? 피해의 기억은 투쟁을 통해 재해석될 수 있지만, 이전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 자체 갱신만이 해결에 가까울 뿐이다.
적용이 아니라 변화
서양사의 시각에서 보면,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을 거쳐 인간은 역사상 최초로 앎의 주체로 등장했다. 문제는 이때 인간의 기준이 백인 남성 중산층이라는 점, 자연 파괴가 동반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식의 한계와 위험성은 페미니즘과 탈식민주의, 생태학을 필두로 재구성되기 시작했다. 이 사유들은 기존의 지식이 틀렸다기보다는 현실을 설명하는 데 부적절하며, 무엇보다 인간이 당하는 억압과 차별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근대적 지식을 성찰하는 과정에서 많은 아이디어가 등장했고, 융합도 그중 하나이다. 영어에서 변화를 뜻하는 ‘트랜스(trans-)’라는 접두어는, 자동차가 로봇으로 변신하는 영화 <트랜스포머>처럼 극적이진 않지만, 다른 물체가 됨을 의미한다. 융합과 가장 비슷한 단어는 ‘유목적 지식’ 혹은 맥락에 맞는 ‘상황적 지식’이다. 융합은 기존의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부터 다른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문예창작학과에서 말하는 ‘크리에이티브 라이팅’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존재할 수 없다. 식민 지배와 분단 등으로 인해 정상적인 근대성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인식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는 구분되지 않는다. 다만, ‘정상국가’ 건설 방법에 대한 이견이 있을 뿐이다. 정당의 정책에 차이도 크지 않을뿐더러 차이가 있어도 실현되지 않는다. 무엇을 기준으로 진보와 보수를 나눈단 말인가. 반북? 반미? 많은 진보 인사들이 자녀를 미국에서 교육시키는 것을 보면, 미국을 아주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 지역차별, 서울 중심주의, 학벌주의, 성차별 등은 확실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제목에 제시된 세 가지 사건의 차이는 무엇인가? 조국 교수 사건은 중상층 부부의 성별 분업의 전형을 보여준다. 정경심 교수는 여성 지식인이라기보다는 가족의 번영이라는 성역할에 충실했던 것 같다. 그러나 조국 교수 가족은 그들의 잘못에 비해, 지나친 사회적 처벌을 받았다. 이는 개인의 피해로 끝나지 않고, 격렬하지만 의미 없는 사회적 갈등을 낳았다.
전 서울시장의 권력형 성범죄는 어느 조직에나 있다. 동성 간에도 있다.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다. 하지만 이 사건은 중요하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에 대한 폭력(Gender-based Violence)은 다른 범죄와 달리, 피해의 ‘경중’(필자 강조)이 아니라 가해자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사건 해석이 좌우된다. 조직 내 성별화된 권력 문제가 아니라 남성들 간의 정쟁으로 여겨진다.
이번 사건도 가해 남성의 삶과 지위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어떤 인간의 삶도 한 가지 사건으로 환원될 수는 없지만, 그 역도 마찬가지다. 남성 사회는 필요에 따라 피해자 혹은 가해자에게(만) 지나친 관심을 갖는다. 관심의 성격도 임의적이다. 숭고한 피해 여성, 아까운 남성, 인간 이하의 남성….
군 위안부 운동을 규율하고 작동시키는 힘은 여전히 한-일 관계고, 이는 2000년대 이후 신애국주의로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독도’와 ‘위안부’는 다른 이슈다. 아니, 전자가 후자를 초래할 수도 있는 사안이지만, ‘우리’는 논쟁하지 않았다. 군 위안부 운동 논란의 쟁점인 ‘돈, 피해자, 조직, 역사 쓰기…’ 전반에 대한 비위(非違) 제보가 넘쳐났음에도 명백한 사실조차 금기시되었다. 금기란 무엇인가. 정의연을 포함, 아무도 그 영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얘기다. 자신도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중산층 가족의 계급 재생산, 남성 세력 간의 갈등으로 변질된 여성에 대한 폭력, 여전한 일본관. 세 사건이 한국 사회를 파악하는 새로운 지식 생산의 계기가 되어야 한다.
정희진 ㅣ 여성학 연구자·문학박사. 글쓰기와 책읽기를 좋아한다. ‘논문, 비평, 수필, 편지, 칼럼’ 등 글의 장르는 없다고 생각한다. 여성학 연구자로서 공부의 목적은, 기존의 논쟁 구도와 전선을 이동시키는 것이다. 여성주의와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재해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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