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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유레카] 소셜믹스 / 김회승

등록 2020-08-23 15:09수정 2020-08-24 02:39

1954년 미국 중부 세인트루이스 도심에 11층짜리 고층 아파트 33개동이 들어섰다. 올해의 건축상을 받은 ‘프루트 아이고’(Pruitt-Igoe). 월 임대료 30달러에 1만2000명이 살 수 있는 공공임대주택 단지다. 도심 한복판 불량 주거지역이 현대식 화장실과 엘리베이터, 오픈 갤러리를 갖춘 최신식 주거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하지만 입주민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입주율이 60%를 밑돌았고 33개동 중 27곳이 빈집으로 남겨졌다. 살인·성폭행 등 각종 범죄도 잇따랐다. 결국 1972년 3억달러의 손실을 남기고 폭파 철거됐다.

프루트 아이고는 건축학계에 ‘값비싼 건축 실험의 실패작’이란 오명으로 남아있다. 소셜믹스(계층혼합)의 중요성을 일깨운 사건이기도 하다. 빈곤층 흑인들을 주변 지역과 녹지로부터 고립시켜 몰아놓은 데다, 이들의 생활방식과 문화적 특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 결과라는 반성이 일었다. 거주 공간은 물리적인 건축의 완결성보다 그곳에 사는 이들의 경제사회적 환경을 고려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

우리나라 공공임대주택은 1989년 노태우 정부가 처음으로 영구임대주택 25만호 건설 계획을 내놓은 게 시초다. 별다른 고민 없이 도심 외곽에 임대 단지를 수천 가구씩 몰아 지었다. 2000년대 들어서야 민간 재건축·재개발에 임대주택 의무 물량을 부과하고, 분양동과 임대동을 한 단지 안에 짓는 소셜믹스가 도입됐다. 최근엔 분양과 임대를 아예 구분할 수 없게 아파트 층·향·동에 상관없이 무작위로 섞는 방식이 시도되고 있지만, 이런 혼합동은 아직 흔치 않다.

도시재생과 소셜믹스는 전세계 대도시들이 맞닥뜨린 어려운 과제다. 미국은 도심 한복판엔 주로 비백인 노동 빈곤층이 거주하고, 중산층은 부도심 단독주택 단지에, 고소득층은 아예 교외에 따로 부촌을 만들어 산다. 잘 섞이지 않는다. 소셜믹스가 안착한 나라들의 공통점은 공공임대주택이 전체 주택의 20~40%를 차지한다는 점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살아본 경험이 있기에, 혐오나 낙인은 생기지 않는다. 임대동과 분양동 사이에 담벼락이 생기고, 재활용 쓰레기통이 몽땅 임대동 앞에 놓이는 일 따위도 없다.

김회승 논설위원 hon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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