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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서울 말고] 동네 책방과 도서정가제 / 권영란

등록 2020-08-23 16:52수정 2020-08-24 12:48

권영란 ㅣ 진주 <단디뉴스> 전 대표

상상할 수 있는가, 내가 사는 지역에서 드나들 책방이 없다? 그런데 현실이 될 수 있다.

인구 35만명의 우리 동네에는 1990년대 초반 70여개의 책방이 있었다. 인구수에 비해 대학교와 학생 수가 많은 지역이라 학교 앞이든 버스 정거장 앞이든 목 좋은 곳에 책방이 있었다. 지금은 헌책방까지 통틀어 20개가 채 되지 않는다. 이마저도 정상 운영을 하는 곳은 몇 되지 않는다. 영상 문화 등 환경 변화도 있지만 책 시장을 독식하는 대형서점과 온라인 유통업체 탓이기도 하다.

도서정가제를 두고 출판·서점업계가 비상이다. 현행 도서정가제가 11월 시한을 앞둔 시점에 민·관 당사자들이 겨우 끌어낸 개정 합의안을 문화체육관광부가 전면 재검토를 요구하며 제동을 건 것이다. 왜? 심히 의아스러운 대목이다. 도서정가제는 한마디로 제값 주고 책을 사자는 제도이다. 현재 3년 주기의 일몰법이다. 현행 도서정가제는 2017년 시행된 것으로 완전 도서정가제가 아니라 부분 도서정가제이다. 할인율이 직접 10%, 간접(적립) 5%이다. 이마저도 대형서점과 온라인서점의 할인 경쟁을 막기 위한 것이다.

나는 출판·서점업 관계자가 아니다. 대형 출판사가 잘 팔리는 작가를 어떻게 확보하고, 대형서점과 온라인 유통업체가 잘 팔리는 책을 어떻게 만들어 내는지, 이러한 책 시장에서 지역의 작은 출판사는 어떻게 버텨내고 있는지, 이들 출판사의 유통망은 어떤지, 사정을 세세히 알지는 못한다. 다만 저자-출판사-유통업체-서점-독자로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독자로서, 텃밭 수준의 생산자(동네 저자)로서 현재 이야기되고 있는 도서정가제에 대해 상식적인 수준으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제값에 대한 것이다. 내가 싸게 사는 어떤 것은 그것이 내 손에 오기까지 과정에서 누군가의 몫을 갈취했거나, 누군가의 노동력을 착취한 결과이다.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그 피해자가 결코 대형 유통업체나 자본가 기업이 아니라는 건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책값도 마찬가지다. 제값, 적정가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책만이 아니라, 모든 생산품은 농산물이든 공산품이든 제값에 팔고사야 한다. 그래야만 선순환 속에 내 노동과 생산품도 제값을 받을 수 있다. 제값(적정가)이 아닌 싸게, 싸게는 내 노동력, 나의 생산품도 싸게 매기고 팔아치울 것이다.

둘째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문화체육관광부의 행보이다. 문재인 정부 들어 지역분권, 지역자치는 주요 슬로건이다. 문체부 사업에도 이를 반영한 듯, 지역문화 활성화 사업이 늘어났고 예산도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올해 사업을 살펴보더라도 지역 출판사와 지역 서점, 지역 작가들을 대상으로 다양한 지원사업이 이뤄졌다. 이들 사업은 대부분 지역에서 책 문화를 활성화하고, 동네 책방과 작은 출판사가 지역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생산하고 공공적 가치를 실현해나가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지역에서 문화자치, 문화분권을 기대하고 있음이다.

하지만 현재 도서정가제를 두고 문체부의 행보는 심히 의심스럽다. 지역 문화를 지키고자 한다며 많은 예산을 들이면서 당장 도서정가제가 무너지면 지역에서 다양한 출판물과 책 문화가 사라질 수도 있는데 말이다. 지역 출판사와 동네 책방은 지역 곳곳의 문화 다양성, 문화자치를 일굴 수 있는 씨앗이다. 단순히 자본과 시장 논리에 던져놓을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남은 시간 문체부가 서둘러 할 일은 대형서점과 온라인 유통업체의 눈치를 볼 게 아니라, 완전 도서정가제를 앞에 두고 출판·서점업계, 소비자와 함께 구체적인 시행 방안 등을 모색해야 하는 게 아닐까.

독자 1인으로서 두고두고 지키고픈 글귀가 있다.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가 내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걸음, 동네 책방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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