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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이봉현의 저널리즘책무실] 진영언론이란 형용모순

등록 2020-08-25 15:54수정 2021-10-15 11:47

한겨레는 민주당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통합당에 역전된 8월, 정부∙여당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보도를 하면서, 일부 언론의 무분별한 정부 공격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한겨레는 민주당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통합당에 역전된 8월, 정부∙여당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보도를 하면서, 일부 언론의 무분별한 정부 공격에 대해서도 비판했다.

이봉현 ㅣ 저널리즘책무실장 (언론학 박사)

‘침묵의 소리’ 같은 표현을 형용모순이라 한다. 역설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수사법이지만, “따뜻한 아이스아메리카노 주세요”처럼 무의미한 말의 나열일 때도 있다. 언론을 지칭하는 말에도 어불성설인 형용모순이 있다. 이제 일상용어처럼 돼 버린 ‘진영언론’이란 말이다. 내 편, 네 편에 따라 사실과 판단이 달라지고, 파헤치고 눈감아줄 일이 달라지는 게 진영언론이면, 이는 언론이 이미 아니다.

부동산 정책 실패 등 악재로 문재인 정부가 ‘민심의 경고’를 받아든 8월, <한겨레>는 청와대와 민주당을 겨냥한 비판을 몇 차례 했다. ‘윤미향·박원순·부동산…“차곡차곡 쌓인 반감, 이제 지쳤다”’(8월19일치)는 20~50대 남녀 6명의 패널을 다시 접촉해, 여론조사 숫자로는 나타나지 않는 민심 변화의 속내를 짚었다. 같은 날 논설위원이 쓴 칼럼 ‘문재인 대통령의 ‘야당 복’, 이젠 끝났다’는 야당 탓하지 말고, 민주당이 중도층의 아우성에 성실히 귀 기울이라 권고했다. 그 며칠 전 ‘수석만 바꾼 채 노영민 유임/ 청와대 쇄신, 민심 저버렸다’(8월14일치)는 기사와, 같은 주제의 사설은 청와대의 안이한 상황인식을 질타했다.

총선 압승 4개월 만에 민주당 지지율이 미래통합당에 덜미를 잡힌 비상한 상황을 반영한 보도였지만, 일부 독자는 불편함을 나타냈다. 전화와 댓글로 접수된 내용 중 대표적 것 하나를 소개한다. “정부가 좀 못하더라도 설명해 주고 왜 그럴 수밖에 없었던지 써줘야 하지 않나. 조·중·동에도 다 실리는 기사를 한겨레가 똑같이 쓴다면 굳이 한겨레 볼 이유가 무언가? 피아 구분도 못 하고 쓰면 안 된다 (…) 독자들이 지쳐 있다가도 힘을 내 민주당과 정부를 지지하고 하려고 한겨레를 보는 것이다.” 물론 “한겨레가 할 말을 했다”는 등 긍정적인 온라인 댓글도 꽤 있었지만,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한겨레의 여권 비판은 독자의 항의를 무릅써야 하는 일이 됐다.

비판의 일관성이 없고 투박해서일 수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우리 편이 돼주는 언론’을 기대하는 독자가 많아진 것도 요인이다. 미디어 환경 변화로 독자가 정치적 취향에 맞는 기사만 골라 읽고, 그런 말을 해주는 매체를 신뢰하는 것이 세계적 현상이 됐다. 언론의 존재 이유는 독자이고, 어렵게 집권한 촛불 정권이 잘되길 바라는 독자의 마음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독자의 변화를 추수해 언론이 누구 편이냐로 사안을 판단한다면, 공론의 장은 목소리 큰 독백만 오가는 황무지가 될 것이다.

언론과 정파의 거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영국의 진보지 <가디언>은 보수당 18년의 고삐 풀린 신자유주의 정책에 완강히 맞서왔다. 1997년 총선에서 정권교체 기회가 오자 토니 블레어의 노동당을 사설 등으로 지지한다. 그런데 노동당이 집권하자 가디언은 집요한 비판자로 돌아선다. 화가 난 블레어 총리가 내각회의에서 “가디언이 우리 편이라고 순진하게 믿지 말라”고 주의를 시켰는데, 이 말마저 가디언에 흘러들어가 꼬집혔다. 특히 1998년 12월 이 신문이 터뜨린 내각 인사들의 금전거래 특종은 집권 2년여의 노동당 정권을 그로기로 몰고 갔다. 이 기사로 ‘신노동당’ 기획자이자 블레어의 ‘분신’이던 피터 맨덜슨 통상산업부 장관이 날아간다. 가디언은 금전 거래가 불법은 아니지만, 새 정부의 경제 철학인 ‘규제된 자본주의’를 주도할 장관의 품성으로는 부적절했다고 사설에서 밝힌다. 그런 기조로 몇년이 가자 가디언의 위상은 세계적으로 높아졌다. 바른 언론이 좋은 정부를 만들어, 국가와 국민을 이롭게 한다는 확신에서 나온 보도 태도였다.

한겨레는 최근 ‘세금폭탄’, ‘통계 조작’ 같은 오도된 프레임으로 정부를 매도하는 일부 보수, 경제지도 줄곧 비판해 왔다. 이런 비판이 내 편 네 편을 따져서 나온 것이 아니며, 정부·여당을 단지 이롭게 하자는 것일 리도 없다. “한겨레의 진짜 문제는 너무 정파적인 것”이란 정반대의 비판도 무겁게 새기며, 한겨레는 어렵더라도 진보 정론을 향해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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