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오피니언 칼럼

[한채윤의 비온 뒤 무지개] 보수개신교의 박해를 받은 10권의 도서

등록 2020-08-27 16:49수정 2020-08-28 02:39

한채윤 l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활동가

지난 25일 미래통합당 김병욱 의원은 국회 교육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여성가족부에서 선정한 ‘나다움어린이책’ 중에 몇 권을 언급하며 “남녀 간 성관계를 노골적으로 표현하고 동성애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미화하고 있고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조기 성애화 우려”가 있다고 평가했다. 언론은 일제히 김병욱 의원실에서 나온 해당 도서의 이미지를 받아 실었다. 알몸의 엄마 아빠가 몸을 밀착해서 누워 있는 그림 아래에 ‘성교는 신나고 멋진 일’이라고 쓰여 있다. 예시가 된 도서 <아이는 어떻게 태어날까>는 덴마크에서 1971년에 나왔고 덴마크 문화부 아동도서상을 받을 만큼 성교육 도서로 유명하지만, 전체 맥락은 사라지고 따로 떼어낸 한 페이지만 부각되었다. 나다움어린이책 프로젝트는 2019년에 시작했는데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긴 걸까. 국회에서 나온 문제 제기엔 뿌리가 따로 있다. 바로 <펜앤드마이크>와 보수개신교 단체들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8월12일이 시작이다. 극우 성향의 인터넷 매체인 <펜앤드마이크>에서 여성가족부 선정 도서들 중에 동성애를 ‘정상’으로 가르치며, 성관계 과정을 지나치게 자세하고 외설적으로 묘사한 조기 성애화 내용을 담은 것들이 있다는 분석 기사를 냈다. 8월17일엔 ‘한국교회언론회’가 거의 유사한 내용으로 ‘여성가족부는 가족해체부냐’고 맹비난하는 논평을 발표했다. 이어 8월20일엔 ‘나쁜교육에분노한전국학부모연합’,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 ‘헤세드결혼문화선교회’, ‘안티페미협회’, ‘생명인권학부모연합’ 등이 모여 정부서울청사 정문 앞에서 ‘포르노 같은 동화책을 초등학교에 비치하는 이정옥 여성가족부장관 사퇴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여가부를 폐지하라는 청원과 책의 배포를 금지하라는 청원이 올라왔고, 그다음날 25일에 김병욱 의원의 발언이 나온 것이다.

혹자는 뜻이 좋다고 해도 문화가 다른 외국 도서를 섣불리 들여온 건 잘못이지 않냐고도 한다. 차라리 그러면 좋으련만, 그것도 아니다. 앞서의 단체들은 이미 2019년에 국내에서 나온 초등학교 6학년 보건 교과서(YBM출판사)에도 같은 비판을 한 바 있다. 교과서의 그림은 남녀가 이불을 덮고 있다. “정자와 난자가 만날 수 있도록 사랑으로 힘을 합쳐요”라는 설명과 페니스와 질이 결합된 생식기의 단면도가 조그맣게 그려져 있을 뿐이지만, 이마저도 선정적인 그림을 교과서에 넣었다고 비난했다. 이들에게 성교육은 순결 교육이고 남녀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만이 아름답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 강박이 얼마나 강한지는 다음 내용의 책들도 함께 폐기 대상 목록에 올려져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불행하다면 자신의 인생을 바꿀 권리가 있다’고 설명한 책은 아동에게 이혼할 권리를 여성의 권리로 설명하므로 위험하고, 토끼와 펭귄 사이에서 태어난 토펭이의 모험담을 담은 동화책은 서로 다른 동물 간의 결합을 미화해서 어린이들에게 수간을 정상으로 생각하게 하여 위험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무엇보다 놀라운 건 여성가족부는 지적받은 도서를 회수하겠다고 밝히고, 공동진행 기관인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은 아예 이 사업에 손을 뗀다고 발표한 사실이다. 지난 2년간 진행해 온 일임에도 두 기관 모두 단 하루 만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 대체 누구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인가.

이번 일로 나다움어린이책 사업 자체도 큰 타격을 받게 되었지만, 해당 도서들은 다행히 시중 서점에서 구입할 수 있다. 너무 훌륭해서 박해를 받은 이 10권의 도서명을 여기에 기록해 두고자 한다.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아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놀랍고도 진실한 이야기>, <걸스토크>, <엄마는 토끼 아빠는 펭귄 나는 토펭이>, <여자 남자, 할 일이 따로 정해져 있을까요>,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 <우리 가족 인권 선언>(엄마·아빠·딸·아들 4권)이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오피니언 많이 보는 기사

한동훈의 ‘생닭’과 윤석열의 ‘대파’ 1.

한동훈의 ‘생닭’과 윤석열의 ‘대파’

대통령이 위험하다 [세상읽기] 2.

대통령이 위험하다 [세상읽기]

[사설] 총선 앞 막 쏟아낸 감세 공약, 이제 어찌 감당할 건가 3.

[사설] 총선 앞 막 쏟아낸 감세 공약, 이제 어찌 감당할 건가

적개심이 된 ‘지못미’…검찰 정치보복성 수사가 부추겨 [이철희의 돌아보고 내다보고] 4.

적개심이 된 ‘지못미’…검찰 정치보복성 수사가 부추겨 [이철희의 돌아보고 내다보고]

조국, 미래의 아이콘이 되기를 [세상읽기] 5.

조국, 미래의 아이콘이 되기를 [세상읽기]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